예수님의 사랑공동체에 주목하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난한 마음, 슬퍼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 자비를 베푸는 마음, 깨끗한 마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마음, 옳은 일을 위하여 박해를 받을 용의가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만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한국교회는 이웃에게 다가가 사랑으로 껴안고,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고, 하나님나라 잔치를 이룩하게 하는 일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 일을 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었으며, 생명이 흘러넘치는 사랑의 공동체 운동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너희는 등잔 위에 촛불이다. 너희들은 겨자나무다. 너희들은 누룩과 같다. 너희들은 산 위에 세운 성이다”라고 말씀 하셨다. 한마디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룩하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쁨과 보람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 운동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이라고 말씀하셨다.

모여 앉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대망공동체를 창출하라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생명의 공동체를 확산시키라고 하셨다. 그리고 생명공동체를 향한 하나님나라 운동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즉 예수님은 과부와 고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떠돌이들과 함께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여기에는 행동하지 않는 한국교회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그대로 담겨져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힘의 철학인 다윗문화에 매몰된 나머지 호화로운 교회당을 경쟁적으로 건축하고, 예수님이 이 곳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한마디로 교회당을 부자들의 입맛에 맞게 건축하고, 예수님의 사역과는 거리가 먼 하나님나라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분명 자신이 있는 곳에 직접 찾아가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쳤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선교는 섬기는 삶으로 시작되었다. 때문에 한국교회도 하나님나라 운동을 예수님의 실천적인 섬기는 삶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실천적인 섬김의 목회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고난당하는 사람, 병신, 떠돌이 등을 위한 하나님나라 선교라고 하기보다는 부자들을 위한 선교에 치중했다. 그 나머지 교회의 십자가탑은 ‘힘의 철학’인 바벨탑에 상징되고 있으며, 교회의 사이즈는 목회자의 인격과 권위를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교회마다 경쟁적으로 교회당을 건축하고, 떠나는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교회마다 교인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교인들은 예수님의 섬기는 삶이 실종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고, 교회들은 교인들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부자들의 입맛에 맞게 교회당을 크게 건축하고, 호화롭게 치장해 교회의 문턱을 스스로 높였다. 이로 인해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또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교회 사이즈로 목회자 평가, 교회건축 부추긴다”

행동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 생명 다한 죽은교회
바벨문화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랑과 생명 넘치는 공동체를 창출해야

교회는 행동해야 한다.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나가 사랑과 생명이 흘러넘치는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만이 교회의 가치와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교회의 사이즈로 목회자 평가

우스운 것은 교회마다 부자들의 입맛에 맞는 교회당을 건축에 경쟁을 올린 나머지, 대부분의 교회들이 무리한 건축비용을 제1금융권에서 빌려 쓰고, 그것도 모자라 제2금융권과 사채를 빌리고 있는 형편이다. 오늘 현재 한국교회가 제1금융권에서 빌려 쓴 빚이 20조원에 달하고 있으며, 사채와 제2금융권까지 합치면 40조원에 달한다. 매년 제1금융권의 이자로 4조원의 헌금이 새어 나가고 있으며, 사채와 제2금융권까지 합치면 7조에 가까운 하나님의 헌금이 엉뚱한 곳으로 새 나가고 있다. 또한 빚을 갚지 못해 해마다 경매에 붙여지는 교회가 350개 교회에 이르며, 이들 교회중 상당수는 한국교회가 이단사이비로 규정한 단체에 팔리고 있다.

이렇게 한국교회 안에서 예수님께서 추구하셨던 사랑이 흘러 넘쳤던 생명의 공동체, 신앙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돈이 바로 하나님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말로만 주여! 주여! 외치지만, 행동하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일부 교회와 단체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 여러 모양으로 예수운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역에서 떠돌이들을 위한 밥퍼 행사를 비롯하여 양로원을 찾아 위로행사, 가정과 사회의 보호에서 벗어난 아이들, 미혼모 지원사업, 다문화 가정을 위한 프로그램 지원사업, 나눔과 섬김을 통한 사랑의 선교 실천, 가난한 이웃나라의 난민 지원사업,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지원사업 등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은 갈릴리의 떠돌이에게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우쳐 주셨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삶에 대한 기본 철학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교훈하신 깨달아 안다는 것은 삶의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실천적인 신앙 없이는 하나님나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했고, 하나님나라 운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 랍비들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실하게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떠돌이, 병신, 날품팔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만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손 하나 까닥하지를 않고, 하나님 계명의 핵은 말하지 않고, 사람의 전통만을 고집하였다. 이들이 한 것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것이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사실 한국교회는 알맹이는 없으면서, 겉치장만 요란하다. 알맹이 없는 영미교회가 망했듯이, 중세교회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듯이, 한국교회 역시 그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 아닌지(?) 교인들은 묻고 있다. 또 하나님은 그의 나라운동과 예수운동에서 크게 벗어난 권위주의적인 힘의 철학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를 향해 무엇이라고 하실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떠돌이, 병신, 날품팔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를 달라는데, 율법을 준 율법학자와 바리세인, 랍비들을 향해 크게 책망하셨다. 분명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든자, 떠돌이, 병신, 날품팔이,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셨다. 하나님 역시 고난당하는 떠돌이들과 함께하며, 이들 속에서 역사하셨다. 오늘 기독교가 위대한 종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원동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는 율법학자와 바리세인, 랍비들과는 크게 달랐다. 이들은 역사 안에서 이러지는 것을 보고 증언했다. 탐욕과 힘으로 세운 바로왕의 바벨탑과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한 제도에서, 바벨탑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참된 사랑만이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잔치를 마련한다. 헌데 오늘 한국교회가 역사를 몰각하고, 사랑과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나눔의 종교이다. 그리고 생명의 종교이며, 용서의 종교이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하나가 원수까지도 용서하라는 것이었으며, 그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고 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라고 가르치셨다.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죄를 깨닫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는 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셨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깨닫고 돌아온 탕자를 용서해 주셨고,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 또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라, 그들이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돌아서지를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돌아서지 않는 부자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무엇이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를 깨우쳐 주셨다. 속은 맘몬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거룩한 척 외식을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권력에 눈이 어두워서 외세와 손을 잡고 바벨탑문화에 심취해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린다며 거룩한 존재라고 자부하는 제사장 무리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타이르셨다.

이들은 눈먼 소경이라고 말하면서도, 남을 이끌려고 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거짓교사라며, 돌아설 줄 모르는 죄인이라고 말했다. 특히 예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깝게 있다고 깨우치셨다. 그것은 체험으로 악을 알고, 새 내일을 갈구하기에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죄인이라고 말한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기만 하면,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하고 계신다. 하지만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를 않고 있다.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껴안아 주실 텐데 말이다. 오히려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권위주의의 상징인 다윗문화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힘에 의한 바벨탑으로 상징되는 향락문화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사실 부자교회와 부자교인들은 힘을 행사하며, 흥청망청 쓰며 산다. 이같이 넓은 길로 가는 것이 죽음에 이른다는 것을 몰각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동시에 서로 사랑하며, 용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며,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선교의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선교는 가난과 질병,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시면서 아파하셨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하는 사람과 생명의 공동체를 이룩하셨다. 이 생명의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일하신 것이며, 땅끝까지 확산되게 하는 운동체였다.

또 이 공동체는 힘으로 약자들을 비참하게 하는 바벨탑에서 뛰쳐나온 탈출공동체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 또한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맘몬과 바벨의 유혹에서 벗어나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하나님나라운동, 예수님의 생명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잘못은 벌리고, 완전히 새 것을 창출하기 위한 운동에 나서야 한다.

교회당을 호화롭게 건축하고, 예수님이 그 곳에 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계신 그곳으로 나가 하나님나라선교를 펼쳐야 한다. 그것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쳐다보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망공동체와는 완전히 다르다.

사실 한국교회는 하늘만 쳐다보면서, 말로 주여! 주여! 부르짖었다. 행동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세태가 되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 속에서 생명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다. 이럴 때 한민족은 물론, 세계민족에게 희망이 있다. 그리고 새 내일을 창출 할 수 있다는 진리를 한국교회는 깨달아야 한다는 지적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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