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재 민 목사

“인내로 영혼을 얻는다”(눅21:19)하시고,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격언)하니 인내는 영과 육 공히 최고의 덕목인 것 분명하다.

하지만 가장 이루기 힘든 것이 ‘인내(忍耐)’다.
개인 차가 있겠지만 사람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본다.
실상 ‘인내랄 것까지야’ 싶은 것들이라 거창한 서언(緖言)에 김이 빠질 수도 있겠다.

암튼 제일 먼저는 ‘졸음’이다.
한 컷 치장한 새침데기 아가씨나, 장군모(將軍帽)를 쓴 영웅도 졸음 앞에는 무너지기에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란 말이 성립된다.

다음은 ‘억울함’이다.
셋방 구할 때 식구 수를 줄여 말하던 시절, 김치전, 파전, 개떡, 술떡 나누며 이웃사촌의 정리를 다지던 세입자끼리 한 달에 한 번은 꼭 시끄러워진다.

‘우리는 선풍기도 안트는데 다리미까지 쓰는 문간방 보다 전기세 더 푼다, 아들이 휴가 나와 3일 있다 갔을 뿐인데 기저귀 빨래하는 건넌방 보다 수도세 더 매겼다’는 것 때문이다.

많아야 100원, 보통은 몇 십 원이었다.
그러나 단 10원이라도 억울하게는 못 내겠단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궁금증이다.
혹 김집사가 미워 못 견디겠거들랑 미워하는 죄 짓지 말고 ‘저기~ 김집사, 있잖아~... 아니야 됐어’하고 돌아서시라. 김집사 오늘 밤 잠 못 잔다.

궁금한 걸 참지 못해 사회문제 되는 것도 있다.
‘태아 성감별’이 그 일례다.
비교 되는 것은 32주전 태아의 성을 말하는 것은 의료법 위반임에도 어떻게든 알고 싶어 하는 우리와 달리, 전혀 법에 저촉 되지 않는 북미지역의 부모들은 ‘curious’보다 ‘surprising’을 택한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의 성향은 영적인 것에도 진하게 배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예언’을 꼽을 수 있겠다.

근본적으로 신령한 은사를 인정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예언’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있는 듯하다.
무슨 뱃심인지 스스로 ‘기도 좀 한다’는 이들은 거침없이 예언을 하려든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언은 ‘내일 비가 온다, 안 온다’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인 것이다.
[마11:13], 예수님 친히 “당신께서 오셨으니 침례요한으로 예언은 끝났다”고 말씀하신다.
그런 까닭에 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전달케 하시는 ‘특별계시’는 사도시대로 끝나고, 기도응답과 같은 ‘일반계시’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다음’을 알고 싶어 열망하는 우리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 큰 것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서둘러 알고 싶어 하는 궁금증의 문제는 국가적 대사에서도 본다.
내일, 2016년 4월 13일은 제20대 총선일이다.
지난13일간의 공식선거운동기간 동안 각종 매스컴이 결과를 예측하는 ‘지지율에 대한 여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우리를 겨냥한 시청률 경쟁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도 있지 싶다.
그러한 여론의 발표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유권자들이 ‘될 사람 찍자’, 또는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자리 잡은 첩보는 ‘적임잔가 보다’해서 뚜렷한 표심이 아닌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선거법이 그냥 두고 있으니 나 정도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겠지만 호기심의 자극에 나라의 향방을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비례대표 기호 5번을 호소하는 ‘기독자유당’의 ‘이슈’다.
이슬람 쪽에도 사람 있을 것인데, 무엇보다 그것이 나라살림의 전부는 아니잖은가? 어쩌면 IS가 우리를 주목하게 될 수도 있는 그것보단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 하겠습니다’가 더 좋지 않을까!

그래서 교회마다 합심하여 기도할 때 일어날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가 궁금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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