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직자 위치 변화 곧 개혁

지금까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남성에 의해서 운영되어 왔다. 이는 곧 여성들이 남성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러러 흠모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런 분위기는 여성들이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는데 있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즉 여성들의 현장목회가 하늘의 별을 따는 만큼이나 어려움에 봉착되어 있다.
한마디로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 그리스도, 새 인간성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높은 직분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가부장적인 성직제도가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하여 상대화되기 시작했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의 변화이며, 개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루터는 중세기에 확립된 가톨릭의 가부장적인 성직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만인사제론’을 주창했다. 이것은 분명 남성과 여성이 협동하여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영미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는 가부장적인 성직 제도를 구축해 왔다. 그것은 성서 자체가 남성의 용어로 쓰여 졌으며, 남성 중심의 역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특히 성서에 나타난 여성들의 하나님나라운동을 철저하게 은폐시켜 온 결과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운동은 여성들에 의해서 전개됐다. 따라서 최근 영미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가 여성 성직자들이 나타나 하나님나라운동의 중심에 섰다. 한국교회만 보더라도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비롯한 기독교대한감리회,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합동개혁, 합동중앙, 중앙총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한국침례회, 성공회 등 대부분의 교단에서 여성안수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교단은 여성안수를 지금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오는 달거리를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자궁은 생명 그 자체다. 달거리가 끝이 나면 새 생명도 잉태하지 못하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많은 교회들이 여성 성직자, 교회내 여성들의 역할 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로 협동하여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변화이며, 개혁이다. 또 새 인간성을 향한 변화이다.

한국교회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열린총회를 비롯한 우리총회 등의 여성총회가 출현했고, 많은 작은 교단에서 여성 총회장이 선출되고 있다. 또한 교회의 각 기구 및 기관에서도 남자 성직자와 여성성직자가 공동목회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가고 있다. 여성목회자들이 성례전을 집전하고, 결혼식 주례를 비롯한 장례식 주례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이상했던 각종 주례와 성례 집전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었다. 그만큼 교회 내에서 여성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가부장적 교회구조를 넘어서는 교회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것이며, 성서의 평등과 평화, 자유의 의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운동은 남자에 의해서만, 여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없다. 남자는 여자의 협조를, 여자는 남자의 협조를 얻어야만 성취할 수 있다. 그리고 남자의 지배구조와 교회의 높은 지배구조로부터 벗어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했다. 그것은 여성이 총회장이나, 감독의 직분을 맡아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마디로 교회에서 높은 지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며, 남녀가 평등한 가운데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항상 변화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실천적인 인간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교회 안에서 실천적 인간평등 이루어내야

가부장적인 성직제도 탈피, 정의와 평등의 예수님 인간성 회복하는 마음 절실
왕성한 활동력과 추진력, 사랑과 생명의 목회가 조화를 이룬 평등의 목회 중요

 교회의 직분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됨과 섬김의 질을 연출하면서, 그의 진리를 증언하기 위한 기능을 고려하여 언제나 새롭게 변경되어야 한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항시 변화하는 교회, 교회에서 인간평등이 실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에서, “종교개혁자들의 만인사제론은 남녀 협동의 실천에서 관찰되어야 한다. 그 협동은 여자들이 보다 높은 자리를 획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존의 가부장적인 위계질서를 상대화시키고 새로운 인간성 남자와 여자의, 또 성직자와 평신도의 평등한 인간성으로 전환, 교회를 자유롭게 하는 길이다”고 남자와 여자, 성직자와 평신도의 협동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성에 의해 하나님의 선교 주도

여성에 의해 하나님나라선교가 저변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것에 대해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성에 의한 하나님나라선교를 평가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구약과 신약시대에도 그랬다. 분명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언자는 여자였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남자의 협력자는 분명 여자였다. 미리암을 비롯한 하갈과 사라, 라합, 드보라, 훌다, 미갈, 룻, 민족의 어머니 에스더, 마리아였다.

그것은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나라와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마다 민족의 어머니며, 민족의 에스더인 기독여성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행동하는 기독여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민족의식을 자각한 기독여성들은 3.1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으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아리랑고개를 힘겹게 넘는 아들과 딸,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기도했다.

지금도 기독여성들은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도하고 있다. 동성애와 이슬람 확산 저지를 위해 기독여성들이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래도 오늘 한국교회와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은, 기독여성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도는 남성들과 다른 기도이며, 다윗문화의 상징인 권위주의가 아닌,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서 나오는 진심어린 기도이다. 그래서 어머니들의 기도는 생명이며, 사랑이고, 자유와 평등을 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기독여성들이 고착화된 남성중심의 권위주의와 봉건주의 사상에 의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다윗문화의 권위주의는 한마디로 자유와 평등한 예수님의 인간성을 상실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회 신앙공동체의 인간성은 소외되고 가난한자, 병든자, 눌린자,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긍휼이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 인간성이다.

땅 위에서 세상을 섬기며, 죽기까지 하나님에게 복종한 그 인간성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인간성에서 성취되었다. 그것은 영원한 인간성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간성은 곧 하나님의 인간성이다. 이 인간성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으니, 남자와 여자 모두의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다. 즉 공동체적인 교회의 인간성이며,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유와 평화를 향한 평등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는 초가부장적인 권위주의의 상징인 다윗문화에서 탈피, 남자와 여자가 협력하여 하나님나라를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이러한 예수님의 인간성은 추상적인 이념에 의하여 파악되지를 않는다. 오직 그 인간성은 담지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의 결단과 긍정, 복종에 의해서만 그의 인간성이 그를 따르는 자의 진리가 된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공동체적인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성인 평등을 세우자

오늘 세계의 죄악은 강자의 지배구조 중심에서 작용한다. 용서와 은혜 아래서 교회는 세계죄악 자체를 고백한다. 따라서 이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세계에 선포하고, 세계에 새로운 미래, 평등과 평화와 자유가 지배하는 미래로 변혁해 나가도록 하는 계기를 열어주는 것이 오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적 과제이다. 기독교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새로운 인간성의 탄생을 말해 준다. 교회의 첫 인간성의 표징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인간성의 첫 표징으로서 바로 교회의 인격이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마리아의 예수 잉태는 가부장적 역사가 종결되었다고 선언한다. 한마디로 구약성서의 초가부장적인 역사가 여기에서 종말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 역시 처녀에게서 태어난 예수는 인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종 됨, 세계기독교의 종 됨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 마리아의 종 됨도 예수님의 종 됨에 참여하는 여종이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종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는 자들의 기도소리에서 ‘종’이란 말을 심심찮게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마리아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어머니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 어머니에게서 모든 여성됨의 자연적, 육체적인 계기가 성취되었다. 이것은 곧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의 어머니가 된다. 또 예수님은 교회의 인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남성적 표현의 예수님은 평화와 자유, 그리고 평등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실 한국교회의 여성들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종 됨의 어머니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는 표징이 되었다. 한마디로 민족구원과 교회성장, 하나님나라운동의 전위대로서, 가부장적 권위주위인 ‘다윗문화’를 거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종 됨에 적극 참여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누가 알아줄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묵묵히 이름도, 빛도 없이 행하여 왔다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작게나마 하나님나라운동에서 소리 지르며, 왕성한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또한 여성신학자들이 계속해서 연구해온 여성신학의 매개가 되었다. 그러나 가부장적이며, 권위주의인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여성의 위치를 폄하해 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치가 남성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여성적인 규정이 은폐되고 왜곡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 사회, 경제, 외교 등 곳곳에서 여성의 위치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도 변화되고 있다. 일부 장로교를 비롯한 정통교단에서 여성안수를 통과하면서, 교회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이것 자체가 변화이며, 개혁이다.

그럼에도 유독 한국교회만은 여성들의 성직과 직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직도 일부 정통교단은 여성안수를 거부하고 있으며, 교회의 직분 역시 여성들이 넘기에는 너무 높다. 그렇다보니 정통보수교단에서의 여성들은 허드레 일이나 하는 집사, 자신의 위치가 주어지지 않는 하찮은 여성교인에 불과하다. 그것은 목회자 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부인들은 교회 안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도,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목회자부인은 목회자와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사모라는 이름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를 않는다. 한마디로 목회자부인 대부분은 아내로, 사모로, 엄마로,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교인의 의무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목회자부인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중심에서 도마 위에 오른다. 그래서 사모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목회자부인에게도 목회자와 함께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교회는, 이제라도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관계에서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 남자들의 왕성한 활동과 추진력, 여성들의 섬세하고, 생명과 사랑의 목회가 조화를 이루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교회, 새로운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칠 수 있다.

사실 한국교회는 남성목회자들의 목회가 수명을 다하면서, 여성목회자들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여성목회자들이 생명과 사랑, 그리고 평화의 목회를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병든자,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온유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 평화를 위해 물러 설줄 아는 마음,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 비우는 마음,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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