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재 민 목사
‘라면 상무’, 포스코에서 상무 직을 얻은 사람이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에게 지나친 위세를 부렸던 2013년 4월의 헤드라인이다.

같은 해 5월, ‘남양유업’의 30대 영업사원이 아버지뻘 되는 대리점주에게 욕설과 폭언을 퍼 부은 통화 녹음이 공개 되면서 ‘갑을’이란 두 글자가 시사적 단어로 부각 되었다.

그리고 1년 반, 추억이 된 줄 알았던 그 단어는 ‘땅콩회항’이 국제적 주목을 받는 가운데 ‘갑질’이란 단어로 upgrade 되어 사회관계 전반에 유행어가 된다.

잊혀 질만 하면 불거지는 갑과 을의 관계, 공개적으로 평등을 깨는 말을 하면 뭇매를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甲乙’이 화두가 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불편한 진실의 반증인 것이다.

입장차는 분명 존재한다.
1997년 4월, 휠체어와 ×표 마스크로 중무장(?)한 IMF 외환위기 단초의 장본인 ‘모르쇠’께서 최고 시청률 25.9%의 청문회에서 뱉어낸 ‘머슴이 뭘 안다꼬’는 5조 7천억짜리 망언이다.
하지만 소수의 갑들에겐 명언이 되었을 것이다.

절대다수가 사회적 ‘乙’이기에 ‘갑질’이란 표현이 대세를 얻지만, 바로 내가 ‘甲’이 되는 경우 ‘내 밥 먹는데’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의 입장이다.
그래서 세상은 ‘갑’이 되려는 몸부림으로 몸살을 앓는다.

나 또한 기회만 된다면 ‘갑질’에서 자유롭지 않다. 분명 그렇다.
그렇다면 ‘갑가(甲家)’들의 언행을 ‘갑질’이라 분노하는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겠는가?
혹여 심하게 분노하는 당신일수록 그 자리가 주어지면 ‘땅콩’보다, ‘모르쇠’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다.

재밌게도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의 법칙은 여기서도 통하고 있다.
그것은 곧 화두에 숨겨진 핵심이 ‘갑질’ 아닌 ‘甲이 되고 싶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甲에 대한 열망의 분출 대상을 교회로 삼는 이들이 절대 적지 않다.

이왕 그럴 것이면 제대로 된 갑이 되어 보자.
그 비결은 예수께 있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셨으니 이 땅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은 누가 뭐래도 ‘절대유일의 甲’이시다.

그런 분의 산실이 마구간이었다.
자기 땅에서 인정받지 못하셨다.(요1:11)
억울해도 너무 억울한 절대 甲은 오히려 “목숨을 다해 섬기겠다”(마20:28)하시며 ‘乙’을 자처하셨다.

그리고 이어진 십자가의 Love story는 그것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심을 확증하신 것이다.

주목할 것은 지금의 우리가 그분을 ‘주님’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자처하신 결과가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어 하늘로부터 땅 아래 있는 만유의 무릎이 그 이름 아래 꿇어지는 진정한 甲이 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에 맛이 들리면 멈추려 하지 않는다.
나보다 갑을 끌어내려 얼씨구나 못 질하며 맛 본 갑질을 여전히 멈추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갑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 눈의 들보...’, ‘겨 묻은 개...’ 등 번지르르한 말로 때우려 말고 예수님께 진정으로 배우자.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빌2:5) 더 이상 만유의 주인께 갑질 말고, 그 몸 되신 교회에서 갑질 말고, 긍휼히 여겨야 할 세상의 갑질에서 자유로워지자.

나와 우리교인 모두가 한세상을 갑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세상으로 끝나는 갑이 아니라 영원하고 진정한 갑을 위한 예수님의 비결을 배우고 적용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파주 영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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