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한국기독교 민족공동체와 유리된 천당가는 언어만 남발
논두렁과 노동판, 시장, 떠돌이 등이 모인 곳에 그물 던져야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교회 언어

교회 내의 언어들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박한 사람들의 언어인가(?) 한번쯤은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천박한 조선백성들과 유리된 천당 가는 언어만을 남발했다. 그 배후에는 국제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되고 천박한 대한민국의 백성들은 그런 것을 별로 따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한국교회는 때와 장소를 최대한 이용했다. 한마디로 교리적인 것을 가르치는데 급급했던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입과 속마음이 다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3.1만세운동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가난한 백성, 교회사의 주체인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 기독여성들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와, 일본과 영미의 국제정치적 음모에 대한 가르침을 행동으로 거부했다. 이것은 이들의 실존적 자기표현이었다. 목이 터지도록 외친 만세!의 외마디가 이들을 결집하게 만들었다. 이들에게는 독립선언문도, 2.8학생독립선언문도 별의미가 없었다.

일인들의 만행은 잔인하고, 교활했다. 한국의 지식층, 선교사들까지 협박과 유혹으로 동조시키면서, ‘체념’이라는 죽음에의 변에 이들을 몰아넣었다. 여기에서의 체념은 당시 전도자들에게 알맞은 말이었으며, 점령세력인 일본지배자를 자극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비역사화, 초현실화의 언어이다. 그것이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내용으로 교회를 정착시켰다. 2년 전 진도앞바다에서 일어난 세월호사건 당시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 “예수를 믿은 아이들은 천당에 갔는데, 예수를 믿지 않은 아이들은 지옥에 갔을 텐데 큰일이다”는 말에서 천박한 목회자들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의 역사성 없는 교회의 언어이다. 3.1만세운동 이후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예수 믿으면 천당에 간다”는 범주에서 있었다. 결과적으로 외세 일인들의 착취행위를 돕는 격이 되었다. 이 같은 사실을 감지한 총독부는 전국적인 집회에 대해 사찰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경도 파견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이 부흥운동에 의해 교회로 모여드는 민중들을 세뇌하는 그들의 언어로 정착했다. 반면 조선시대에 배척을 당한 불교는 산으로 숨어들어간 대신에 민중 속에 파고들어 민중의 언어를 만들었다. 성서에는 ‘천당’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없다. 민중의 체념적인 말을 한국교회가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에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분명한 것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가난하고 천대받고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한을 풀어주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억울한 자의 혼을 등에 업고, 산사람의 억울함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보수계의 목회자, 부흥사들의 설교, 양적성장을 자랑하는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내용은 불교나, 무교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예화나, 경험담 등으로 엮어나가는 설교는 어디까지나 생활주변의 이야기로서 민중들을 실감나게 하는 언어였다. 이 언어는 피안적인 위로이며, 헌금을 잘 내면 화를 면하게 되고 출세하게 되고 분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복채를 받는 것과 흡사하다.

사람들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내용에 신학적인 것은 없는데, 어떻게 민중을 매혹하는지에 대해서 묻는다. 이에 대해 한편에서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고, 신학적인 목사와 신학자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말한다. 80년대 이전까지 목회자 대부분의 설교내용은 천박하고 가난한 교인들이 원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것이 예수 믿고 천당 가라는 것이었으며, 체념에 마취된 상태에서 죽음에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었다.

▲ 한국교회는 처음 민중들이 모여 있는 곳에 그물을 던져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교회가 민족공동체와 유리된 교리적인 것만 가르친 나머지 교회는 가난한 민중들과 유리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은 ‘희망’

기독교의 핵심은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사랑과 생명, 그리고 희망의 종교이다. 그렇다면 영미의 정통보수주의 신학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생명, 그리고 희망의 종교로서 역할을 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 발전의 주역이 될 수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반성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신학 작업은 이들과 완전히 유리된 서구의 사고와 논리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삶이나, 교회발전에 별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서구의 신학도 마찬가지였다. 신학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교회는 점점 비어 갔으며,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떠났다. 한마디로 서구의 권위주의적인 다윗 문화는 저들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신학의 주체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초기에는 저들을 중심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친 결과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들을 비역사화하고, 피안에서 도피만을 유일한 구원의 길처럼 이끌어 왔다. 그 결과 민족공동체와 그 운명에 대해 아랑곳 하지 않는 게토된 민중을 만들어 냈다. 교회의 강단에서 민족의 운명과 유리된 추상적인 천국과, 돈이 곧 하나님이라는 등식으로 교회공동체는 타락한 중세교회를 방불케 했다. 이것은 또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로 치부를 받고 있다.

결국 이것은 교회와 사회가 유리되는 결과를 초래했고, 정치경제적인 측면서 볼 때는 교회안의 저들과 교회 밖의 저들이 같은 처지에 있었음에도, 다른 언어를 쓰는 저들이 되었다. 이런 역사가 길어지면서 교회 안의 언어는 교회 안에 머물러 버렸고, 결국 이 언어는 기독교 특수집단의 언어로 민족공동체와 유리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대한민국의 영구통치를 꾀해 곳곳에 신사라는 우상이 세워질 때에도 한국기독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변화되는 역사에 무뎠던 것이다. 해방이라는 사건 앞에서도 교회는 교회내 목회자의 설교는 피안적이었다. 새 역사의 장을 기대하고 교회로 몰려들었던 젊은이들은 ‘교회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 실망만을 안은 채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이런 긴 잠은 4.19를 거치고, 군사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아무런 외침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교회가 비역사적이었으며, 비판정신이 무뎠던 것이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들은 가진 자와 권력에 의해서 이용만 당했다.

그럼에도 전통교회들이 아낙네와 배우지 못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알기 쉽고, 동감할 수 있는 ‘은혜스러운’이란 언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교회를 고수하려고만 했지, 새로운 세상과 교회를 향한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또한 진보적인 교회들은 이들의 언어에 대해서 신학적 언어로 맞섰다. 그 언어는 서구에서 직수입한 것으로서, 그 선봉에 선 극소수의 신학자들도 소화하지를 못했다. 이것이 오늘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한 서양이 버린 싸구려 신학이다. 그렇다 보니 여기에서 벗어난 목회자는 이단이라는 올무가 씌워지고, 수많은 이단사이비연구가들이 나서 한국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다.

게토화된 교회내의 교인들의 언어

교회의 설교자들은 4년 이상 이런 신학을 훈련받고 현장에 나간 사람들이다. 처음 이들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의 언어와 교회 회중의 언어와의 차이에 당황한다. 이런 딜레마에서 절충해서 나온 언어가 지적 냄새가 나는 에세이 같은 언어로 되어버렸다. 이런 언어는 지식층에도 의미 없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은혜롭지 않았다. 진보나, 보수의 정통교회에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성장에 급급하고,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온갖 혜택을 누린 한국교회가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잘못된 바램이었다. 그렇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떠나서는 결코 이룰 수 없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부자들의 교회로 변질되면서 그대로 증명했다.

백낙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한국의 전형적인 교회는 시골교회이고, 전형적인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농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이들을 위한 선교보다도, 도시의 부자들을 위한 선교에 치중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한국교회는 부자들에게 알맞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야 했고, 이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짜내야 했다.

예수님 역시 종교지도자, 아니 종교귀족들이 사는 예루살렘을 청소하시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지방의 죄인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의 사역을 실천한다고 외치는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이제 한국교회가 변화되어야 한다며,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교회를 옮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행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새 시대를 책임질 교회는 변해야 한다. 그것은 소통하지 않고, 담을 높이 쌓은 게토화 된 교회 내 민중언어권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것은 민족공동체와 끊어진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비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즉 교회의 언어는 교회 안의 사람이나, 교회 밖의 사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민중의 언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일부 목회자들이 교인들의 수준과 국민들의 수준을 고려한 언어를 사용,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이런 교회들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언어는 분명 이야기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목회자의 삶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개념적, 논리적 사변의 언어는 생존을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또한 바른 삶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상관이 없다. 농촌의 논두렁과 노동판, 동대문시장 등에서 떠돌이들이 어떤 말을 쓰는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목회자들의 강단언어가 얼마나 이방어적인가를 알 수 있다. 한국교회가 정말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사람이 많은 곳에 그물을 던져야 한다. 그곳은 바로 농민과 노동자, 떠돌이, 빈민들이 모여 사는 세계이다. 그 그물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 즉 예수의 언어여야 한다.

예수님의 언어는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 교회 내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언어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병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이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데서 저절로 생겨난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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