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이 ‘구원’이다. 이 구원은 역사적 상황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구체화될 때 비로써 가능하다. 구원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 풀어 놓는 인간 해방을 말한다.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것이 무엇일까(?) 오늘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비인간화에 대하여 한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 붙였다. 이 때의 율법은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바리사이파 체계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한마디로 당시 ‘죄’는 누르는 자가 눌리는 자에게 붙여준 딱지였다. 거꾸로 말하면 범죄를 당한 사람이 죄인이 되고 말았다. 안식일법과 정결법이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법 가운데 한 조항만 어겨도 죄인이었다. 그것은 오늘 정통보수주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루를 벌어먹고 사는 사람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율법을 적용해, 주일날 일을 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죄인의 올무’를 씌웠다.

예수님 당시 밥벌이를 위해서든, 몸이 아프든 간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무조건 죄인으로 몰아 사람이 아닌 것으로 단정해 버렸다. 그래서 안식일은 걱정 없이 하루 세끼의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과 건강한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법이 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 떠돌이, 병신, 병든자들에게는 지킬 수 없는 법이었다.

그것은 정결법도 마찬가지이다. 밥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아도 정결법에 위반돼 ‘죄인’으로 몰렸다. 목동이나, 가죽 제조업자나, 오물 처리자는 몸에서 악취가 풍겨 정결법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몸을 더럽힌다고 생각되는 차녀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그대로 죄인이 되어 사람축에도 끼지를 못했다.

떠돌이와 목동, 창녀, 날품팔이, 병신 등은 바리사이파의 비인간화시키는 체제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구원은 저세상 것과 이 세상 것이 구별되지 않는다. 어찌보면 성서는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구원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 것도, 어디까지나 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질 현실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 역시 현실의 역사에서 이루어질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송기득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신의 주권이 이루어지는 세계를 의미하며, 이것을 오늘의 상황에서 해석하면, 인간화가 실현된 세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비인간화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이 실현된 세계를 의미한다”고 자신의 저서 <끝내 사람이고자>(1990년, 한길책방)에서 밝혔다.

성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다. 구원을 갈망하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그 세계의 실현을 위해서 결단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구원의 길에 나섬으로 구원의 길이 열린다. 이들의 구원은 어떤 것이든 이들 스스로의 창조적 행동의 소신에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의 말과 행동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다가 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과 부유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해 끝장을 내려고 한 예수님의 선언이다.

한마디로 이 선언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미래의 희망을 주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사람이 사람으로 받들어지는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구원의 요체이다.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리고, 떠돌이, 병신, 고난당하는 사람들 스스로가 예수님의 역사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만이 새로운 세계, 교회와 사회의 변화을 기대할 수 있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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