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분열 이미 예견된 것

교회의 분열은 한국선교 초기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역사는 처음부터 하나님나라 선교인 예수님의 역사현장에서 나오는 역사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분열의 역사였으며, 다툼의 역사였다. 1934년 찬송가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교육부에 의해서 분열된 이후, 이들에 의해서 공과도 분열되었다. 이는 선교사 협의체인 선교사공의회의 분열로 이어졌다.

찬송가와 공과는 많은 이권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1년 사이에 장로교에서 출판한 찬송가가 함께 사용하던 찬송가보다도 많이 팔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재미를 본 장로교 교육부는 공과도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다. 이는 해방이후 장로교를 비롯한 교단들이 연쇄적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특히 한국기독교가 일본식민지 세력의 가장 큰 협력자였다는 사실 앞에 한국교회가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기독교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 중심에 한국장로교를 비롯한 감리교 선교사들도 있었으며,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앞을 다투어 일본 식민지세력에 빌붙어 온갖 혜택을 누렸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는 한민족의 아픔에 동참하는 대신에, 민족과 유리된 채, 권위주의의 상징인 다윗문화를 이 땅에 건설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한국기독교는 고난당하는 민족의 역사현장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성에 있었던 귀족종교의 형태를 그대로 띠었다. 바리새적이며, 율법주의자의 형태를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앞을 다투어 경쟁적으로 일본 식민지세력에 아부했다. 피압박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를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영미 선교사들도 적극 가담했다. 예수님의 역사현장과 거리가 먼 호화로운 교회당을 경쟁적으로 건축하며, 다윗문화를 교회 안에 뿌리내리게 했다. 오늘 한국교회가 귀족종교로 변질돼, 예수님의 사역인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며,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천박하고 싸구려 복음만을 전파했다. 결국 이는 민족의식을 자각한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다. 또한 민족주의 세력과 항일독립운동 세력이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했다. 민족분열의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기독교는 해방 그 이전부터 분열된 상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예수의 역사현장을 몰각한 채, 귀족들을 위한 하나님나라 선교운동을 펼쳐 왔다. 이것은 결국 교단 분열을 가져왔고, 교회분열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는 모든 이권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심에 친일에 앞장섰던 장로교 서북파들이 있었다.

장로교단의 이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장로교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세력에 협력한 대가로 6개의 법인을 받았다. 이는 해방이후 장로교가 일본 식민지세력에 협력한 파와 신사참배를 거부한 파의 분열 원인이 됐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분열은 선교초기부터 이미 예고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와 같은 분열과 다툼은 교단 내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여파는 이웃교단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이 분열을 경험했다.

이는 영미선교사들이 자국의 교파주의와 정통보수주의 신학을 한국에 그대로 이식시켜 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이 한국기독교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신앙이 되었으며, 이 싸구려 신학과 신앙이 최고인 것처럼 포장돼 오늘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인양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통보수주의 신학은 결국 민족의식을 자각한 조선의 가난한 백성, 예수의 역사현장으로 가자는 측과, 갈등과 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이 때부터 한국기독교의 분열은 예고된 것이었다. 그 이후 한국기독교계의 각 교단은 이웃교단과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사태가 일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기독교 내에서 세력 확장을 위한 전투 아닌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식민지 민족의 아픔에 대해서 한국기독교는 답하지 못했다. 여기에다 한국기독교는 정교분리정책을 먼저 일본 식민지세력에 제시하며, 교회를 한민족과 유리시켰다.

이는 한국기독교운동이라고 자화자찬하는 3.1운동만 봐도 쉽게 드러난다. 사실 한국기독교운동이라고 평가하는 3.1운동은 기독교지도자들이 일제에 항거한 운동이 아니다. 3.1운동의 주체는 가난한 조선의 백성과 기독여성, 기독농민이었다. 기독교가 내세우는 민족지도자 16인은 만세운동의 현장에 없었다. 당시 죽임을 당한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기독농민, 하찮은 기독여성, 꽃도 피워보지 못한 젊은 처녀, 어린이들이었다.

대신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일본식민지세력의 주변을 맴돌며, 많은 혜택을 누렸다. 심지어 선교사들 중에는 3.1만세운동에 가담한 기독교인들을 ‘폭도’로 매도하기도 했다. 그것은 미국선교사들의 자국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상황에 있었던 한국기독교의 분열은 해방이후 극에 달했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는 한민족의 아픔, 예수님의 역사현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직업성직자’들이 나타나 일본식민지세력에 붙어 빌어먹는 비겁함을 보였다. 오히려 ‘직업성직자’들은 철저하게 고난당하는 한민족을 이용했다. 해방이후 교회의 분열 당연한 것이었다.

 
잘못된 역사에 대한 자책과 자성 절실

잘못된 역사 반성 없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자성해야 함에도, 한국기독교는 분열을 거듭하면서, 예루살렘 성을 쌓기에 바빴다. 하나님나라운동을 교회 안에 매몰시켜 버렸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사치였다. 그것은 한국기독교가 일본식민지세력에 붙어 많은 재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무조건 아부하고, 정치적으로 억눌린 사람,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당시 한국교회는 정의, 인권, 등의 낱말조차 모를 정도였다. 또한 젊은 학생들이 피로써 민주주의를 부르짖을 때, 일반지식인이나, 교수들이 거리로 나가 학생들과 민주주의를 외쳤던 당시에도, 한국기독교는 죽은 듯이 잠잠했다. 그리고 군사정권 아래에서도 한국교회의 침묵과 외면은 계속됐다. 한국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교회 내부에서 그랬듯이 사회적 갈등과 이념적 갈등, 세대간 갈등, 계층간 갈등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결국 교회가 민족과 유리되는 결과로 나타났으며, 오늘 한국교회가 민족과 유리된 채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민족 갈등의 중심에 있는 한국기독교가 어떻게 민족통일을 이야기하고, 국민통합을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를 묻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회가 민족통일과 국민통합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기독교가 하나되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주문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인 과오에 대한 자책과 반성 없이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없다. 하나의 교회도 기대할 수 없다. 한국기독교는 권력의 주변에서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예언자적인 전통과 예수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향해 ‘정치목사’라고 낙인을 찍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독재 정권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주도했다. 심지어 일부 목사들은 ‘교회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울에 내려온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목회자들의 잘못은 한국기독교의 연쇄적인 분열을 만들어 냈다. 사회통합을 말해야 하는 목회자들이, ‘좌파’니, ‘우파’니 하며, 이념적 갈등을 부추겼고, 가진자의 편에 서서 노사갈등을 부추겼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는 교회적, 사회적 갈등의 중심에 있으면서, 교회분열에 앞장섰다.

해방이후 한국교회의 분열은 신사참배를 둘러싼 분열을 비롯한 진보와 보수의 분열, WCC가입을 둘러싼 분열 등등 분열의 연속이었다. 이제 장로교단은 300여개로 분열되었으며, 연합단체도 같은 이름으로 계속해서 분열되었다. 또 교권과 권위주의를 내세운 연합단체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찬송가도 분열되었고, 성경도 분열되었다.

이러한 분열은 한국교회가 권위주의와 교권주의, 명예주의, 교파주의에 매몰된 결과이다. 한국기독교 보수연합단체의 대표를 자처해온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한국교회연합과 분열됐다. 성경은 성서공회와 성경공회로 분열돼 별도의 성경책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밖에도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회가 2개로 분열돼, 각각 딴살림을 차렸다. 민족복음화운동본부도 2개로 분열되었고, 많은 부흥사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또한 세계기독교총연합회도 2개나 창립됐다. 누가 보아도 이 같은 분열과 창립은 하나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이 같은 분열은 한국기독교내의 기득권을 가진 지도자들이 교권과 명예, 권위주의를 내려놓지 못한 결과이다. 여기에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이 예루살렘성을 높게 쌓고, 종교귀족화에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작은교회와 대형교회간의 갈등을 낳고, 교인쟁탈전이라는 악순환을 조장했다.

하나의 한국교회는 없다

이는 또 교회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교회 사이즈로 목회자를 평가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그렇다보니 교회마다 경쟁적으로 호화로운 교회당 건축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너무나 부자가 되었다. 부자교인들이 교회의 직분을 구축하면서, 교회는 이들의 정서에 맞게 교회당을 건축해야 하고, 이들의 정서에 맞게 실내장식을 하는 폐단을 낳았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위축된 가난한 교인들은 교인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 심지어 대형교회들은 떠난 교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결국 이웃교회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교인들의 신앙공동체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가 하나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이러한 잘못에 대해 자성과 자책 없이 하나의 교회는 없다. 한국교회를 걱정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하나의 한국교회를 위해서 현장의 목회자들이 예언자와 예수님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국교회는 예언자의 전통을 이어 말해야 하는 곳에서 말을 해야 한다.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통에 잠긴 민족을 위해서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믿고 천당가라’, ‘하늘나라의 척도는 헌금의 액수’ 등등의 말이 아닌, 분단된 민족의 한복판에서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말해야 한다. 이것은 한민족의 소원이며, 한국교회의 아픔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예수의 역사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가난한사람과 소외된 사람, 떠돌이, 병신, 문둥병자, 고난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크게 성장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한국교회는 제3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어날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는 예수님의 역사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곳에는 정의와 평화와 이해와 화합과 사랑이 흘러넘친다.

그것은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분열이 있을 수 없다.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바리새적이며, 율법적인 예루살렘성에서 벗어날 때 한국교회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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