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작금 세상의 유소년과 청소년들의 인성 교육은 저 멀리 가버렸고 남은 것은 지식만을 강조하는 형식적 교육뿐이다. 그것도 이스라엘식 질문을 통해 전인적인 자기 개발을 위함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으로 인성보다 지식만 암송하는 기계적인 인간 완성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학교 교육을 통해 지식은 머리에 담았으나 인간으로서 사회에 살아가는 예의범절을 배우지 못해 윤리와 도덕은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에 불과 하고 잔 지식만 머리에 담은 로봇 같은 인간을 길러내는 것이 현대 교육의 맹점이다. 배우기는 하였지만 밥 먹고 살아가기 위해 지식을 배운 것이지 학교에서는 윤리와 도덕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와 범절은 전무하여 위아래가 없고 오로지 유아독존이 되어 젊은 청소년들과 나이 많은 노인 세대 간의 불통은 이미 예견된 사회문제다.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 간에 존경심이 사라져 학생들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의 지도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대부분 학생들은 스승의 가르침과 지도편달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스승에 대해 막말과 성적 희롱과 대항하는 못된 버릇이 일상화 되어 교육으로는 한계성에 이른 것이 교육현장의 현실이다. 이는 학교 교육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교회에서 이러한 교육현장의 비교육적인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대해 비평만 하지 말고 적절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교회 위상은 거의 세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년 중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부담하는 헌금으로 국가와 사회가 할 수 없는 교육에 대해 교회가 적극 나서야 하며 혁신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기독교의 세력이 작게는 칠백여만 명에서 많게는 일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국민의 거의 사분일 수준의 수가 기독교도들이므로 나라와 사회가 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 대한 정서교육을 시기가 늦기 전에 종교의 몫으로 감당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보고 듣고 하는 모든 것들은 스마트폰의 앱과 더불어 살아가는 청소년들은 그 심성이 게임 속 죽고 죽이는 방법 밖에는 배울게 없다. 청소년들은 자칫 극단적인 생각 외에는 딱히 여유를 가지지 못하며 더욱 안타까운 현실은 무방비로 노출된 야동으로 인해 성적윤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기회만 되면 성인물을 답습하고 양심에 꺼린다고 생각지를 안는다. 성적 쾌락에 대한 욕구는 이미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상당수가 이미 이성을 경험하였다고 하는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유해 환경에 노출된 유소년과 청소년들을 어떤 방법으로 구출 할 수 있는지는 국가의 교육적인 과제이나 종교단체 특히 기독교의 신앙으로 인한 인성 교육이 절대 필요한 현실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러한 요구조건에도 불구하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아니면 소가 닭 보듯이 하는 현실이 매우 수치스럽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기독교는 성경적인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는지 아니면 세속화되어 세상의 기업군상과 대등한 종교기업으로 만족할 것인지는 모르나 기독교는 성경적인 올바른 길을 저버리고 있음이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기독교가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대두되는 실정이다. 기독교는 세상의 죄악으로부터 영혼을 구원하는 구속의 종교다. 그런데 미래 한국교회를 등에 져야 할 유소년과 청소년들이 사회의 성인들을 위해 장사 속으로 설치한 성인물에 노출되어 있는데도 근본적으로 근절할 대책을 강구하기는커녕 국가의 처분만 바라는 눈치다.

그러니까 종교가 해야 할 몫을 뒤로하고 손 놓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는 현실은 종교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가 아닌가 한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생명을 사랑하는 사랑의 종교다. 그런데 미래의 생명 사랑을 책임질 유소년과 청소년들이 사회악에 빠져 허덕임을 보고도 손 놓고 있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함과 동시에 세상의 종교성도 저버린 어처구니없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이 시점에 기독교가 세상에 왜 존재하는 가에 대한 본질적인질문을 제기해야 만 한다. 지금 기독교가 가고 있는 길은 성경이 금기한 세속적인 길을 가면서도 모른 채하는지? 거의 대형교회를 갈망하고, 첨단 건물을 추구하며, 청소년들의 보살핌과 교육에는 인색하고, 독거노인들의 생활은 뒷전(?)이며, 헌금은 모으기만 하고 쓸 줄을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다. 교회가 겉은 멀쩡하고 십자가 네온의 불빛은 찬란한데 실제 빛은 바랬고 소금은 맛을 잃는 중이 아닌가? 백년대계 교회 위상이 어떻게 변할지 지금으로선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저 시간만 흘러감을 안타까워 할 뿐이다. 세속에 정신 팔려 있을 때에 신랑 주님이 공중에 재림 하신다면 누가 신부가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담임/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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