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바빌론의 벨사살이 느브갓네살을 뒤이어 왕이 되었으나, 죽음이 일상화된 세계는 달라진 게 없었다. 왕은 날마다 연회를 즐겼다. 그때 경악스러운 심판의 징조가 나타난다. 연회장 촛대 맞은편 벽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겁에 질린 왕은 제후들, 박사들, 술사들을 시켜 그 뜻을 물었으나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 왕은 공포에 사로잡혀 괴성을 지르며 부들부들 떨었다(단 5:6).

벨사살은 황후의 제안으로 옥에 갇혀 있는 유대청년 다니엘을 불러들였다. 만일 회벽의 글자를 해석하면 자주옷을 입히고, 나라의 셋째 권력자를 삼겠다고 제안한다(단 5:16).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로서는 인생을 뒤바꿀 기회가 굴러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은 뜻밖에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걸 다른 사람에게 주십시오. 그래도 저는 그 뜻을 해석해드리겠습니다’(단 5:17) 라며 거침없이 느브갓네살과 벨사살의 죄악을 논죄한다(단 5:20-24). 자기 인생을 뒤바꿀 절호의 기회를 뿌리치고 진실을 말하는데 거침이 없었던 다니엘. 그는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로서 간사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일제에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맹세한 대가로 출세에 목이 말랐던 청년이 있다. 나중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후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를 흠모하는 자들에 의해 그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온갖 업적으로 미화시키고, 역사를 비틀고, 말을 비트는 일이 일어난다.

사도 요한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듯이 들어 주신다고 믿은 사람이다. 그가 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확신”(요일 5:14/표준)은 ‘말하는 존재로서의 확신’이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타자와 교류한다. 대상에 따라 말이 위축되거나 억압된다면 진정 자유인일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류는 물질이 아닌 ‘말’에 의존한다. 우리가 평소 이해하기 어려운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말을 걸어오신 사건이기도 하다. 기도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말로서 하는 교류이다. 그러나 기도가 지향하는 바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다. 이기심과 탐욕은 기도를 내게만 머물게 한다. 우리는 나를 향한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게만 머무는 기도는 나를 비굴하게 만든다. 이웃을 향한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한결 성숙시키고, 숭고하게 한다.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말을 비틀고, 실패를 업적으로 둔갑시키는 이들에게서 성숙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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