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6.25를 맞았다. 우리에게 6.25전쟁은 단지 이 땅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으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동족 간에 서로 죽이고 죽어야 했던 동족상잔의 가슴 아픈 전쟁이었고, 아직도 그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북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한국전쟁은 남과 북 모두에 씻을 수 없는 희생과 상처를 남겼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만 3백만 명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쟁은 북•중과 미국대표 간의 2년여에 걸친 협상과 서명으로 끝났다. 남과 북이 3•8선 부근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물고 물리는 피의 사투를 벌이는 동안 전쟁 당사국인 북한과 미국은 전쟁을 끝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북진통일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끝내 휴전협정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6.25전쟁은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북이 남침할 수 있도록 기회와 명분을 준 것은 분명 남한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의주에서’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막상 북이 남침해 오자 남한의 안보태세와 병력은 너무도 허약했다. 아무 기습 남침이라 해도 단번에 부산 낙동강 일대까지 밀렸다는 것은 우리의 국방력이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UN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립이 어려웠을지 모른다. 맥아더 사령관이 이끄는 미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부터 북한군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고 곧 서울 수복에 이어 10월 1일에 다시 3.8선을 넘어 북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압록강 일대까지 밀고 올라간 연합군의 기세가 꺾인 것은 중국이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중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군이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면 동북아 정세와 더 나아가 중국 안보에도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여 북한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인해전술에 밀려 퇴각하기 시작한 국군과 유엔군은 결국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잃었다가 다시 반격을 시작해 38선 부근에서 소모전을 계속했다. 서로가 차지하는 영역은 별로 없이 하룻밤만 자고 나면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피 말리는 일진일퇴의 전투로 희생되는 군인의 숫자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더 이상 끌어봐야 서로에게 득이 될게 없는 싸움이었다.

한국전쟁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볼 때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진 일종의 국지전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국가의 정체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63년이 지났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역학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남한의 경제력이 급성장했지만 정치외교적 구도는 소련이 해체 된 후 미국의 대항마가 중국으로 바뀌었다는 것 말고는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

남북 관계도 과거나 현재나 달라진 게 없다. 북은 핵으로 무장하고, 남도 미국에 의지하여 군비를 확충함으로써 한반도의 미래를 힘의 논리에 맡기는 양상이다. 문제는 이런 힘의 논리가 강대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고 화해와 평화에 대한 기대치를 낮춘다는 점이다. 강대강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남과 북은 미래를 향해 조금도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이 필요하다. 교회만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동족 사이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상대에 대해 증오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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