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법정신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사는 참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은 이웃과 정을 나누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관계가 설정돼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스라엘 역사가 말해주듯이 가나안 정착이후 소유가 생기고, 왕권이 수립되어 권력이 인간관계에 개입하면서 시작됐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

7월은 법의 달이다. 과연 한국교회가 법정신을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서 7월 법의 달을 맞아 따지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구약의 법정신은 철저하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그것은 오늘 현대국가의 법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성서에는 세법전이 나온다. 계약법전(출애굽기), 신명기법전(신명기), 성법전(레위기)이 바로 그것이다. 이 3법전 모두 상황의 차이는 있다. 분명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계약법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착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서, 고대 이스라엘공동체와 왕권수립 사에 쓰여 졌다. 이 법전은 처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전제로 한 법령으로 시작된다. 히브리인이 가난 때문에 저당함으로써 노예가 될 수 있으며, 그가 결혼한 부인과 자식까지도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6년 동안 빚을 갚지 못하더라도 7년이 되는 해에 석방해야 한다.

그래서 안식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부리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부림을 당하는 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식객과 함께 종들의 안식이 중점적으로 고려되어 있다. 종은 노동해 줄 의무가 있으며, 반대로 주인은 노동력을 소유한다. 그렇다고 부리는 자가 종이라고 해서 생명을 소유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부리는 자가 남종이나, 여종을 막론하고 구타해서 상해를 입히면 안된다. 숨지게 할 때는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 눈을 멀게 하거나, 이를 부러트리면 부림을 당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이렇게 계약법전은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보다 일찍 기록된 함무라비법전에는 노예가 3년 동안 그 임무를 다하면 4년째 되는 해에 석방하라고 쓰여 있다. 어찌 보면 노예보호에 대해 계약법전보다도, 더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월룸’이란 상류층에 국한되어 있다. 그것은 계층적 구별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계약법전과 다르다.

분명히 계약법전은 하나님 이외의 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나, 남의 아내와 재물 등을 탐내지 말라고 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라오 밑에서 종살이 할 때를 기억하고, 이웃과 더불어 건강한 삶을 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계약법전이 이스라엘의 부족공동체 산물이라면, 신병기법전은 이미 왕권체제가 갖추어진 당시의 상황에서 만들어졌다. 당시 사회는 왕권체제 아래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격차가 심해져 있었다. 이 법 역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으로 노예에 대한 관용을 말하고 있다.

신명기 17장에 왕의 권한을 최대한 금령하는 내용이 나온다. 지나치게 군사력을 강화하는 일, 후궁을 두는 일, 치부를 꾀하거나 사치하는 일, 왕은 법인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사제의 가르침을 받고, 그 법대로 살아야 하며, 동족을 얕잡아 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등의 내용이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

신명기법전은 또 안식일법에서 노예석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안식년에 노예들을 석방할 때, 빈손으로 내보내는 것은 공수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처할 곳도 없고, 생계수단도 없는 저들을 빈손으로 내보내면, 그것은 절도범을 빈손으로 석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명기 법전은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내 보낼 때 빈손으로 내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양떼와 타작마당에서 거둔 것, 술틀에서 짜낸 것 등 한밑천 되게 마련해주어야 한다”(신명기 15장 12-14절)고 못 박고 있다.

또 신명기법전은 노예가 탈출해서 피신을 요청하는 경우 그 노예였던 자를 주인에게 되돌려 보낼 수 없다는 법규이다. 이것은 노예에게 탈출 할 수 있는 자유의 문을 연 것이다. 성서의 계약법전은 이자를 받는 것과 겉옷을 담보로 잡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약자들을 노예로 삼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신명기법전도 변리를 받는 것을 금할 뿐 아니라, 담보를 강요할 수 없고, 차압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노예제도를 막자는 의도에서 나왔다. 계약법전보다 진일보한 법제도이다. 탈출한 노에를 보호함으로서 원소유주의 보복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그렇다고 모든 노예가 주권을 행사 할 처지는 아니었다.

신명기 법전은 비록 저들이 가난해서 노에가 되어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임을 과시하는 계율을 제시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축제에는 아들, 딸, 말, 레위인, 남종, 여종 등 모두가 똑같이 먹고, 즐길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들의 인권이 동등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성법전은 종교공동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한 제사법, 가정윤리, 성윤리, 우상에 대한 경계, 사제와 재물에 대한 법규 등에 집중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든 생활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축제이다. 그럼에도 성법전의 중심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법규이다. 그 내용은 축제이나, 혁명적인 대사회변혁을 겨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레위기는 안식년에 대한 법 준수를 강조하고 있다. 안식년의 법규는 너의 남종이나, 여종, 품꾼, 식객과 더불어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레위기 23장6절) 7년이 되는 해에는 일체 추수하지 않으므로 약자들이 수확하게 하여 연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일곱 해를 일곱 번 해서 일곱째 달 10일에 나팔소리를 크게 울리라고 했다. 이것은 “너희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신호인 것이다. 이것이 희년이다. 성법전이 선포될 때 포로된 자들 전체가 노예였다고 생각할 때,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라는 대목이, 무엇보다 자유가 없는 노예계층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계약법전으로 돌아가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의 종살이 경험을 했다. 계약법전 앞에 중대한 전제가 있다. “너희 하나님은 나 야훼이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니”(출애굽기 20장 2절)가 그것이다. 신명기법전에서는 이 전제가 계속해서 반복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것이 어떠했는지를 서술한 것이다. 그것도 추수절마다 반복하도록 되어 있다.
인권적 차원서 약자보호법령 구분

“너희는 근거 없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악인과 합세하여 권세부리는 자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말라. 다수를 따라 불의에 가담하지 말라. 재판정에서 다수를 따라 그릇된 판결이 내려지도록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신명기 23장1-2절)

이것은 오늘 재판정과 직업 재판관을 전재로 한 것이 아니다. 법적 권한을 가진 공동체가 시비를 가리는 경우이다. 성서에 나타난 약자는 과부, 고아, 몸 붙여 사는 자를 구박하거나, 괴롭히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임신한 여인 보호령, 가축을 맡았던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규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법도, 모두가 약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특히 노인공경을 사형과 결부시켰다. 그것은 노약자 보호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밖에도 신명기법전의 12계율 중 우상금지와 가족 내의 성윤리 법규 등 네 개를 뺀 나머지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구체적인 법조항이다. 소경, 떠돌이, 고아, 과부의 인권을 짓밟는 자는 저주받을 것임을 공동체에서 맹세시켰다. 특히 노약자보호법은 계약법전보다 더 구체적이며, 경계선을 옮기는 죄,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자에 대한 처벌법 등 모두 강자가 할 수 있는 범죄로서 역시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이밖에도 화간을 했을 경우에는 쌍벌죄를 적용했고, 강간을 당한 여인의 권익보호 위한 법규,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지시하고 있다. 이 같은 법령이 나오는 것을 보면, 왕권 아래서 권력과 결탁에서 오는 인권침해가 다반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약자보호법은 출애굽기 22장 24-26절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어렵게 사는 나의 백성에게 돈을 꾸어주게 되거든 그에게 채권 행세를 하거나, 이자를 받지 말라. 만일 너희가 이웃에게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출애굽기 22장 24-26절)

이것은 법령보다도 호소에 가깝다. 하나님은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시기 위해 “그가 나에게 호소하면 자애로운 나는 그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자가 낸 소송사건에서 그의 권리를 꺾지 말라”고 했다. 신명기버전도 다른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령이 있다. 레위기에는 토지 공개념에 대한 지적도 있다. “땅은 내것이요. 너희는 식객에 불과하다(레위기 25장23절) 이것은 희년 실현을 뒷받침하기도 하지만, 사회개혁의 기초를 놓은 셈이다. 분명한 것은 계약법전을 비롯한 신명기법전, 성법전 모두는 십계명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졌다.

예수님과 충돌된 안식일법과 정결법

예수님은 안식법과 정결법과 충돌했다. 당시 바리새파는 국민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 구약을 동원했다. 유대교에서의 하나님 법은 모세 오경에 국한되어 있다. 이것은 정결법과 안식일 법으로 그대로 나타난다. 당시 바리새파는 국민운동을 일으키는데 구약을 동원했다. 이들이 내세운 법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 떠돌이 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 왔다.

정결법은 원래 사제계층에게 국한된 것이었다. 이를 일반인에게 확대시켜 사회적 약자들을 여기에 묶어버렸다. 한마디로 사회 전방에 파급돼 가난한자와 병든자, 그리고 불결한 직업을 가진 자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안식일법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저들이 배고파하는 현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또 못가진 자의 구체적인 삶의 자리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약의 법정신은 사람이면 배고픈 자를 돕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랑들이 안식일 날 배고픈 사람들이 일을 한 것이 불법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을 고쳐 준 것이 잘못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는 현장이었다. 예수님의 입장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는데 있다. 예수님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조차 가로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법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다. 특히 법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변질 시켜 버렸다.

안병무 박사는 자신의 저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1986년, 한길사)에서 “성서에는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된다”고 전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이 참삶이다. 그런데 이 같은 삶이 병들었다. 그것은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의 것을 빼앗는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의미를 말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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