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날

           릴케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시고
들녘에는 많은 바람을 놓아주십시오.

마지막 남은 열매들을 무르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풀어 주시어
그들을 무르익도록 재촉하여, 마지막 남은 단맛이
짙은 포도주로 고이게 하십시오.

제 집이 없는 사람은 다시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이제 고독한 사람은 이 후로도 오래 고독을 누릴 것입니다.
밤이 지나도록, 책을 읽고, 긴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나뭇잎이 휘날릴 날에는
불안에 떨며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소석 정재영 장로(시인, 문학평론가)
릴케(1875~1926)는 오스트리아 태생 독일 시인이다. 연인 샬로메의 긴 영향과 51세에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장미를 꺾다가 가시에 찔린 후유증으로 사망한 일화가 야화처럼 유명하다.

이 작품 안에는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이 각 연에 차례로 배열되어 있다. 겉으로는 서정적인 노래와 같지만 계절의 특성을 통해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색의 담론을 담아내는 작품이다.

첫 연은 가을의 기원인 여름을 동원하여 가을의 의미를 말하고 있다. 가을은 ‘위대한’ 여름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름이 보여주는 열정적인 활동은 자연을 통한 신의 수고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가을날에도 신의 그림자가 해시계 위에 드리기를 원한다. 여기서 가을은 단순한 역사적인 시간(카를로스)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카이로스)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전제로 보면 가을은 종말론적인 의미의 마지막 때에 소원을 올리는 기도시다.

두 번 째 연에서 가을 열매의 익어 감을 통해 인간의 성숙하게 됨을 은유적으로 소원하고 있다. 짙은 포도주로 되기를 소원하는 말은 그것을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마지막 연에서는 노년의 모습을 겨울로 암시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들이 다시는 집을 짓지 않는다’ 함은 새로운 도전과 추구를 할 수 없는 희망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두 고독에 깊이 빠질 수밖에 없는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낮과 밤을 잊고 과거의 회상에 젖는다. 책을 읽는다는 독서 행위는 미래지향보다는 자기 반추를 하는 과거회상의 심리를 의미한다. 곧 진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불안한 날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더욱이 시의 창작으로 의미 있는 것은 불안의식을 ‘바람 부는 날의 가로수 길의 방황’으로 치환해 냄으로 강열한 감각적 이미지를 동원하고 있는 점이다.

가을은 신이 내리는 축복의 기간이다. 인간은 겨울과 같은 마지막 시절에는 고독과 방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가을날이라는 은총의 시절에 신에게 더욱 가까이 가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가을은 신에게 다가가야 할 계절인 것이다.

이처럼 가을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누구나 다가올 겨울이라는 인생의 마지막 날에 필요한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사전에 준비하고 추구하여야 종교적인 심성을 일으키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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