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제사장 사무엘의 두 아들이 뇌물을 받고 사법제도를 문란케 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백성의 장로들(원로)은 이를 약점으로 삼아 평소 왕권에 대해 부정적인 사무엘에게 ‘우리도 왕을 세우겠다’며 집요하게 압박한다. 저들은 강력한 국가 건설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권력구조 개편으로 득을 보려는 계산이다. 사무엘은 어쩔 수 없이 장로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왕이 백성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경고한다.

“왕이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하지만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장로들은 사무엘의 경고를 허접하게 여긴다. “아니요,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왕이 앞장서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삼상 8:20) 왕이 강력한 나라의 수장이 되어 자기들을 대신해서 싸워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남의 힘을 빌어서 편히 살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최후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이 서열 다툼으로 분란이 났을 때: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눅 22:25-26a). 집권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도 마치 은인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고,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무슨 공이나 세운 것처럼 업적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강력한 왕권 제도에 대한 경고와 다르지 않은 말씀이다.

요즘 정치권에 개헌 논의가 분분하다. 그것도 여당에 의해서가 아닌 다수당이 된 야당에 의해서다. 나라 경제는 위태하고, 서민의 삶은 날이 갈수록 팍팍해지고, 애도가 일상화되어 슬퍼할 겨를도 없는 때. 설상가상으로 브렉시트로 세계의 미래가 불확실할 때에 정치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다른 모양이다. 오늘의 난국의 원인이 권력구조가 잘못된 때문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개헌에 저렇게 매달릴 까닭이 없을 것이다. 사무엘의 약점을 파고들어 왕권제도를 수립한 백성의 장로들이나, 국정의 난맥상을 빌미삼아 권력구조를 개편하려는 정치인들의 의식구조가 과연 무엇이 다를까.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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