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에 나타난 법 정신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로 바리새파를 내세웠다. 바리새파는 구약을 동원해서 국민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운동을 위하여 예언의 글과 구약의 고전, 그리고 랍비들의 성서해석을 원용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국민운동의 규율로 적용했다. 결국 이것은 법이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 역시 바리새파들이 주장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는 신약성서에 나타난 법정신에 크게 위배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한국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회자들은 어떻게 변명할까(?)

하나님의 법은 국가 안에서 눌린 자, 가난한 자, 떠돌이, 과부, 어린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바리새파는 하나님의 법을 국민 전체를 기동화 하는 도구로 이용했다. 이는 법대로 살 수 없는 계층에게 역기능을 가져다가 주었고,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셨다. 한마디로 바리새파 사람들이 철저하게 동원한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충돌할 수 밖에 없얶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사제계층에 국한된 정결법을, 이를 지킬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확산시켰다. 오늘 한국교회가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동원해서 바리새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 목회자들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회적 약자들을 향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교회당을 하나님의 성전인 만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나와라”, “교회에 나오기 전에 몸을 정결케 하라” 등등 성서와 대치되는 천박한 말들을 강단에서 쏟아내고 있다. 이런 말들은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사는 사람과 쓰레기를 치우거나, 대장간 등에서 일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이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님 당시 정결법은 생활전반에 파급되어 있었다. 이는 가난한 자, 병자, 불결한 직업을 가진 직장인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중에 예수님과 충돌의 계기가 된 것은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었다. 손 씻는 것은 제사 전에 사제가 제사를 집행하기 위한 사제법에 근거한 것인데, 종교적 권위로써 제재하는 법규가 되었다.

이것은 생활에 맞는 것이 아니었다. 또 사람의 생명을 위한 것이 되지 못하고, 사람을 삶에서 유리시키고, 정죄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법은 인간을 위하는 법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바리새파에게는 사람의 삶의 현실보다도 그 법규를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문제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분명 복음서에 나타난 대로 바리새파의 입장이다.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잘라 먹었다. 그것은 못 가진 자들의 구체적 삶의 자리이다. 구약의 법정신에 따르면, 배고파하는 자들을 돕는 것이 지상과제이다. 그런데 모세의 법으로 생활규율을 세우고, 모세를 권위로 내세우면서 그 기본정신에는 아랑곳없이 단지 저들이 안식일법, 즉 안식일에 일했다는 것이 불법이라는 시각에 경직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또 한 손이 오그라진 자를 고쳐 주셨다. 그는 사회적 약자였다. 그를 불구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곧 모세의 법정신이라고 했다. 바리새파는 누가되었던 안식일법에 위반되었다고 고발하는 위치에 있었다. 한마디로 안식일법 제정의 본래 뜻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분명 법의 정신이 유린될 뿐만 아니라, 법조문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또 모세의 법은 이혼했으면, 이혼증서를 써주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남성위주 사회에서 남성을 향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들이 이 조항을 마음대로 해석했다. 이혼을 허락하고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혼을 편법으로 삼았다. 이런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다.

예수님의 삶의 현장

예수님은 삶의 현장에서, 법에 대한 입장이 단호했다. “안식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이다”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은 법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법은 사람의 삶을 보호하는데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것을 방해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법을 파괴하지 않았다. 단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하는 자유조차 가로 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그렇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 법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다. 사람이 법에 예속될 수 없다.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괴변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때,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장4절)고 법주의자들에게 물었다.

이 말은 법을 위해 법을 내세우는 법주의자들을 규탄하는 내용이다. 사랑을 가로막는 법질서, 그것은 본래 법의 정신에 대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부 정치적인 목회자들부터 교단의 헌법과 규칙 등을 내세워 동역자를 죽이고, 교인들을 치리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현대 교회에서 사랑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이다. 특히 목회자들은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게 교회의 법을 고치고, 교회 내규를 만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각종 소송사건에서 승리하면, 거기에 도취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앞을 다투어 교회내규를 만들고 있는 것도, 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하는 법정신에 크게 벗어난 것이다. 이들은 어떤 행위나 그것이 법조문에 저촉되느냐 만을 묻는다. 이러한 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전제로 한 법정신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법주의자들과 충돌했던 행위는 윤리적인 면에서의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행위마저도 제약하고, 방해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그것은 철저하게 인간해방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예수님의 해방은 가난하고, 병든 자, 소외된 자, 떠돌이들이 제집으로 돌아가 함께 살 수 있는 여건을 갖추어 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성서의 법정신, 예수님의 법정신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성서의 법, 정의로운 사회 건설

법주의자는 어디까지나 외향적이고, 형식주의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것은 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또 법을 왜곡시켜 사회적 약자들을 옭아매는데 교묘하게 이용한다. 예수님은 그런 법주의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법집행이 형식논리에 지배될 때, 법은 자체의 정신에 침해를 받는다. 그리고 인권유린의 구실을 한다.

인권을 유린하는 법은 그 동기가 어떻든 용인돼서는 안된다. 바리새파는 법을 국민운동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서, 어쩔 수 없이 법의 한계를 드러냈다. 한마디로 민족전체의 정신운동을 위해서 법질서를 원용했다. 즉 그 법질서를 지키는 자는 ‘의인’이고, 못 지키는 자는 ‘죄인’으로 규정했다.

여기에서 지키는 자와 못 지키는 자의 분계선은 종교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압도적 다수는 그 법질서에 순응 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능력이 없었다.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단순히 범법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법이 ‘하나님의 법’, ‘모세의 법’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것이다. 이들은 결국 종교사회인 이스라엘공동체의 변두리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의 사정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오늘 보수적인 한국교회는 주일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교회의 공동체에서 자연스럽게 소외시키는 것이 현실이다. 한마디로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행동하지 않는 교회가 바로 한국교회이다. 그래서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현장으로 가라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역사의 현장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활동하며, 친히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병신들의 권리를 옹호해 주는 행동하는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들을 옹호했다는 구실로 범법자, 범법 방조자, 선동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안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

“무엇이든지 밖으로부터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가복음 7장15절)

예수님의 이 선언은 법의 한계성, 그것의 절대성을 주장할 때에 올 위험을 투시한 선언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문제를 삼은 것은,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먹고사는 삶의 문제였다. 예수님은 입장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로 시작되는 산상수훈에 그대로 집약되어 있다. 초기 한국교회 역시 이를 따르려고 노력했던 흔적이 있다.

1893년 선교사협의회는 10개조의 선교정책을 발표하면서, 우선 선교대상을 노동자계급을 상대로 하고 있다. 그 후에 상류계층, 남자보다는 부녀자, 도시보다는 지방에서부터 전도운동 등을 골자로 한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선교 20년 만에 25만명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이러한 선교정책은 한민족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민족의 수난과 유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과는 상관없이 총궐기하여 3.1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정교분리정책은 비겁한 자들의 자기방어의 방패가 되고,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민족의 수난과 유리된 채, 군살 같은 것이 되어 3.1만세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우리민족과 관계없는 이질적인 종파라는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 같은 교회의 모습은 오늘에 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교회가 스스로 살려면 이 민족사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예수님의 법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분명 한국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평생 사람대접을 못 받고 가난과 박해에 신음하던 민족이 교회에 몰려들어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이를 잃어버리고, 부자가 된 나머지 예수님이 거부한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백낙준 교수는 자신의 저서 교회사에서 “한국교회에 있어서 전형적인 교회는 시골교회이고, 그리스도인은 건강하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한 농부이다”며,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웠다. 반면 서구정통신앙에 물든 이광수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지적수준이 낮은 것을 비판했다. 이 두 사람의 견해는 오늘 한국교회의 양면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예수님의 법정신과 사역은 공생애 전체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법을 내세운 자들은 법으로만 예수님을 제재할 수 없어지자 정치권력과 야합해서, 법이 법을 유린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 형틀에 처형했다는 사실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목해야 한다. 그 관점은 예수님의 수난사에 잘 드러나 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새 법전의 정신과 그 방향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병무 박사 역시 자신의 저서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1986년, 한길사)에서 밝히고 있다.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나, 가난한 자 보호를 법의 제정으로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법질서가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유린한다고 보고, 그것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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