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中)

"처음에는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언제고 누구에게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다만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죽더라도 잔인하게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칼에 맞아 죽느니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지요. 돈을 주고 죽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대게 총으로 죽여 달라고 말할 겁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게 오히려 예삿일이다 보니 절로 체념이 되더군요. 싸울 의지조차 생기지 않았습니다. ‘키갈리’ 이웃도시인 ‘카시루’에서만 4,000명의 투치족이 살해되었습니다. 군인들이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와 한데 모여 앉으라고 말하더군요. 수류탄을 터뜨려 한꺼번에 살해할 생각이었던 게지요. 사람들은 모여 앉았습니다."(당시 대학살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던 ‘로랑 은콩골리’가 ‘필립 고레비치’와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

원래 르완다의 민족을 구분했었던 것은 영국인 탐험가 ‘스피크’가 시초였었는데, 투치는 우월한 종족, 후투나 트와는 열등한 종족이란 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족 분리 정책이 후의 식민통치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후반에 거치면서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 내의 갈등을 틈타서 독일 제국이 식민통치를 하게 되는데 독일제국은 투치와 후투족이 분리된 민족이라는 인식을 퍼트렸다. 그 후 1945년 5월 8일 독일의 패전으로 대신 벨기에 사람들이 르완다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는데 벨기에는 햄족 이론을 내세워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투치족 출신 왕들을 내세워 후투 족장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후투 왕국을 해체시켰으며, 소수 상류층인 투치족과 다수의 후투족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후투와 투치족을 분열시켜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이에 따라 강제 노동정책들과 무거운 세금은 투치족의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당시의 많은 젊은 농부들은 높은 세금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간다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독립 이후, 그동안 쌓여 온 증오는 외양으로 구분된 민족 사이의 선을 고착화시켰고 투치족이 한 번 선점했던 기득권을 두고 두 민족은 계속 갈등과 원한을 쌓아올리게 된다. 그 결과 1959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리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의 민족 간 갈등으로, 수십 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질병, 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고 1994년 여름부터 불과 몇 개월 동안 국제사회의 방관 속에 100일 만에 80만 명이나 죽어나가는 대참사가 벌어지고도 했다. 정치적 목적으로 특정 민족에 대한 말살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르완다 집단학살(Rwanda genocide)이라고도 부른다.(참고 : 나무위키)
작금의 우리 대한민국은 6.25 전쟁, 종전 이후, 북핵문제로 인하여 남북 분단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남북 간에 평화통일과 대화를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막막함뿐이다. 이렇게 갈등의 골만 깊어짐으로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위기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만에 하나라도 ‘르완다’와 같이 주변국들로 인해, 불행 사태가 남한과 북한 간에 발생 하게 된다면, 도대체 어느 나라, 또 누가 폭소를 터트리며 노래를 부를까? 따라서 아무리 애국의 명분이 있다 해도, 동족간의 전쟁발발 요인들만은 막아야 한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71주년 광복절도 연래행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4)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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