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가끔 필자가 미국을 방문하면서 선물을 준비할 때면 남대문 시장에서 냉장고에 붙이는 조그마한 장식물이라든가 몇천원이면 족할 액세서리나 물건들을 구입한다. 우리 같은 면 쳐다보지도 않은 그런 자질한 선물들을 미국 친국들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한다. 유학하던 딸아이의 친구들과 지인들을 위해 보내준 선물도 결코 그 수준을 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이 그렇게 감사해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그럴 때면 필자의 속마음이 미안하고 편치 않았던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생에게 주어도 시원찮을 선물을 다 큰 성인들이 받고도 좋아하니, 도대체 우리나라 선물 문화가 얼마나 타락했다는 말인가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결국 김영란법은 말도 많고 탈고 많았지만 합헌결정으로 확정되었다. 처음에는 필자 역시 “아니, 그 돈으로 어떻게 명절 선물을?”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미국 친구들 선물이 생각났다. 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오래만에 건너온 내가 내민 고작 몇천원짜리 선물에도 그렇게 행복해 하는데, 우리는 왜 반드시 수십만원을 넘는 큰 물건을 내밀어야만 생색이 나는 것일까? 그 만큼 우리의 선물 문화가 선물 그 차제를 넘어 부패와 부정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즉 우리에게서 선물은 선물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굳이 선물의 사전적 의미나 사회적 가치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선물은 그것을 매개로 “내가 당신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하는 정감의 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이상이 되면 뇌물이 되고, 그 이하가 되면 체면치례가 된다. 뇌물은 근본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체면치례는 허례허식의 표본일 뿐이다. 이러다보니 고가의 선물이 아니면 주는 사람은 체면을 세울 수가 없고 받는 사람은 “나에게 겨우 이정도?”라는 모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초라한 선물이 오히려 두 사람을 불편하게 할 뿐이라서 결국 단위가 커지게 되고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은 결국 뇌물이 되고 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김영란법이 정한 한도 금액도 많다. 이것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다. 왜 식사접대비와 선물비가 그렇게 많아야 하는가? 필자의 생각에도 그 한도를 넘어서면 뇌물일 가능성이 높다. 바른 의식구조라면 그 금액으로도 충분히 당사자의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번 김영란법은 세밀한 시행령까지 보완하여 아주 강력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절대로 저항하는 세력에 밀려 유야무야 되는 법령이 되어서는 안된다.

현실적으로 농축어민들이 받아들여야 할 충격적 손실에 대해서는 필자의 마음도 아프다. 명절 대목을 위해 준비한 고가의 선물 용품들의 판로가 막혔으니 영세한 자본으로 버티는 그들의 현실적 애로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인 바,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과거의 아픈 유산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부정부패 순위가 OECD 국가들 중에서 상위권인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뇌물 청탁을 발본색원해야 하겠고 김영란법은 그 첫걸음이므로, 농어민들의 손실에 대한 국가적 대책을 주문하면서 향후 농어민들 역시 선물이 아닌 다른 판로를 개척하는 노력을 요청한다.

뇌물은 망국의 징조이다. 그것은 부정과 부패의 씨앗이며, 뇌관이다. 그것을 두고 선진국가를 말할 수 없고, 도덕적인 사회를 논할 수 없다. “뇌물과 청탁은 곧 패가망신”이라는 의식구조가 우리 사회에 형성되어야 한다. 항간에 떠도는 우스개 말에 “제일 주고 싶은 선물이 ‘마음’이고, 제일 받기 싫은 선물이 ‘마음’”이라고 한다. 그 주고 싶은 마음을 담는 것이 정성어린 선물이고, 그 마음이 담긴 선물이 무엇이든 받는 사람은 기뻐해야 한다. 받는 사람이 심중에 그 선물의 액수를 가늠해보는 순간 그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선물을 준비하는 이가 그 액수를 고민하면 이미 그것은 선물이 아니다.그야말로 선물은 선물일 뿐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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