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선교-하나님의 의(義)

하나님의 복음은 영미 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나, 식민지 신앙이 아니다. 또 종교적 관념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의 초월성이다. 박순경 박사는 자신의 저서 <민족통일과 기독교>(한길사)에서 “하나님의 초월적인 의는 불의한 세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며, 세계로 하여금 그의 의와 그의 나라의 실현에로 이끄는 구원의 능력을 의미한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은 박 박사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적인 차원에로 또는 저 세상에로의 도피가 아니다. 세계의 불의를 불의로서 통찰하게 하고, 이를 극복하고 신앙의 결단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종교의 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에다 한국교회는 영미의 지배자신학인 정통주의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에 옭아 메여 세계 지배세력과 결탁하고,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거기에 안주하고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가 말하는 추상적인 영성은 하나님 의의 초월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영적’, ‘영성’이란 단어를 내세워 기독교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종교로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서 벗어난 신앙인들을 향해 한국교회는 가차 없이 “믿음이 없다”고 말한다.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선교사들로부터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종교를 배운 결과 익숙해졌다. 영미선교사들이 가져다가 준 정통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은, 한국교회에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최고인냥 착각하며, 무소불의의 힘을 행사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한국 땅에 상륙하여 심령부흥회와 영적각성집회를 주도하며, 기독교라는 종교를 뿌리 내리게 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가난하고 천박한 조선의 백성들에게 공헌한 점도 많다. 하지만 이들은 민족의 아픔인 피압박민족의 아픔을 몰각하고, 조선의 백성들을 향해 ‘회개’와 ‘천당’, ‘축복’, ‘추상적인 하나님 나라’만을 강조했다. 그 결과 이 땅에는 ‘돈이 신’이 되는 종교를 만들어 냈고, 추상적인 사후의 하나님 나라만을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특히 선교사들은 피압박 민족의 아픔에 대해서 침묵했다. 또 우리의 역사와 문화는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나님나라와 신앙은 인간과 역사를 미래에로 행진하게 하는 동력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세계의 지배세력이나, 특권층과 결탁하고 거기에 안주하라고 추상적인 영성을 조선의 백성들에게 강요했다. 여기에다 영미문화와 일본문화가 최고인냥 대변인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의 추상적인 영성은 초월성과 순수한 복음이 아니었다.

성서에 나타난 선교의 원형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증언, 역사의 한복판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업신여기며, 죄인으로 규정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한복판에서 활동한 예수님의 행위, 십자가 죽임의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선교의 분명한 원형이 이렇게 있음에도 영미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역사 현장에 있기는커녕, 지배세력이나, 특권계층과 결탁하는 모습만을 보여주었다.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 결과 오늘 한국교회는 부자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역사현장과 거리가 먼 부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행동하는 교회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를 못했다. 그리고 민족의 아픔이며, 염원인 통일선교에 대해서 침묵하게 했다.

목회자, 세계와 민족 죄의 회개 촉구 전령자 역할 수행 필요

복음의 초월성과 순수성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과 결단에서 임박해 오는 하나님 나라, 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세계와 민족의 죄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전령자였다. 그러나 세계는 하나님나라를 거부했다. 그리고 선포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서 받아들였다.

죽음의 세력으로부터의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는 이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구원에 이르는 길로서 선포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선교의 위탁을 받았다고 고백했다.(마태복음 28:16-20절, 마가복음 16장14-16절, 누가복음 24장 36-49절, 요한복음 20장19-23절, 사도행전 1장8절). 성서에 기록된 대로 한국교회의 하나님나라와 구원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의 구원의 복음에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에 이의를 달아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행동하는 교회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전령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민족통일과 기독교 참조>.

교회와 선교의 근거가 분명함에도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기는커녕,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각시킨 영미의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적이며, 신민지 신학과 신앙, 정통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에 빠져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게 했다.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는 복음의 초월성과 순수성을 상실했다. 한국교회가 좋아하는 단어중 하나인 성령은 예수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는 진리의 영이며, 구원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 성령은 사도들을 자유롭게 하는 영인 동시에,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대로 세계민족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영이다.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성령의 역사하심 등의 복음은 세계의 종말적 구원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종말적 복음은 세계의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의 구원이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의 죄악과 죽임의 세력들을 명확하게 알고, 증언해야 한다. 그 소리를 듣는 자들로 하여금 그의 의의 나라와 생명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한다.

이러한 복음의 사명을 받은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오늘 목회자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초기 영미선교사들은 사도의 직분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영미 기독교가 안고 있는 지배자 세력의 정신적 지주되었던 근본적인 문제 상황을 알지 못하고, 싸구려 신학과 신앙을 한국교회 교인들에게 뿌리내리게 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을 매개로 해서 기독교를 접할 수 있었다. 또 서양 기독교의 문제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사도직분을 계승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럽으로 건너가 문화가 된 기독교 확산의 역군들이었다. 이러한 서양의 기독교의 과오를 인식한 한국교회가 복음을 새롭게 선포하는 계기를 맞이한다면, 한국교회의 변화와 발전에 공헌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예수님을 성전 예수로 만들어 놓았고, 예수님께서 사역하셨던 ‘역사의 현장’과는 거리가 먼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쳐 왔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영된 영화 <쿼바디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결국 한국으로 와서는 대기업이 되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이 영화는 ‘갈릴리에 오신 예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대기업화 되어가는 타락한 한국교회’를 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기독교 선교과제에 집중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교회가 대기업화되고, 담임목사 세습이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타락하고 있는 일부 목회자의 탐욕과 맘몬의 모습과 교회헌금 횡령 등으로 고발돼 실형을 받은 대형교회 목회자의 타락한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다. 한마디로 도발적이고, 도전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분명 이 영화는 순수성과 초월성을 잃어버리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쁜 일부대형교회 목회자의 죄악상을 고발하고 있음에도, 이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이 영화의 상영을 반대한 목회자들 역시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교회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성서는 선교와 복음의 중심을 서양의 잘못된 신앙과 신학에 두라고 하지를 않았다. 무게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라고 했다. 그리고 이웃에게 두라고 했다. 그런데 이 같은 성서의 진리를 망각한 한국교회는 무게의 중심을 교회당과 돈에 두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노동자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하게 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마이너스 성장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심지어 한국교회는 복음의 순수성과 초월성을 담은 종말론적 신앙을 잘못 이용하는 사례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종말론을 강의하며,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하는가 하면, 무소유를 주장하며, 교인들의 헌금을 유도하는 사례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세미나에 참석한 목회자들이 그대로 따라서 교인들에게 헌금을 유도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교회마다 돈을 신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복음의 초월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결과를 빚고 있는 폐해이다.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신앙을 목소리 터지도록 외쳐온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로마로 가서 제도를 만들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를 만들고, 미국으로 가서 기업을 만들고, 한국으로 와서 대기업을 만드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한국교회 안에서 과거 선교의 주체였던 노동자, 농민, 떠돌이들의 아픔과 함께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에 바쁜 교회로 타락했다. 그 죄악상을 고발한 것이 바로 영화 <쿼바디스>이다.

하나님의 의의 선교 펼쳐라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아니 기독교가 권력과 탐욕에 결탁하고, 부자종교로 변질되면서, 복음의 순수성과 초월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민족과 세계의 죄악을 증언하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을 일으켜 왔다. 오늘 한국교회가 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과 분단극복에 대해서 답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신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면서, 이단논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호화로운 교회당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있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말하는 축복이며, 성령의 역사, 예수님의 선교이다.

누가보아도 이 같은 선교정책으로는 더 이상 교회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아니 민족과 세계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오히려 부자가 된 한국교회는 도덕적 타락은 물론, 윤리적 타락 등으로 인해 교회 안에서 끝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많은 교인들이 교회분쟁과 이단논쟁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교회를 떠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억해야 한다. 교회의 무게중심을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두었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한국교회가 권력의 맛을 보면서, 피압박민족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며, 권력을 대변해 왔다. 그것은 영미선교사들이 전해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신학과 식민지신학, 정통주의 신학, 근본주의 신학을 그대로 받아들여 맘몬과 바벨을 노래한 결과이다. 기독교를 맘몬신과 바벨신으로 만들어 버린 한국교회가 과연 이단과 사이비를 말할 수 있느냐고 많은 교인들이 묻고 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역사현장으로 돌아가는 선교정책을 펼쳐야 한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계신 서울역과 논두렁, 민족의 아픈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휴전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의 현장, 이국땅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떠돌이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선교이며,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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