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오늘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을 통해 안방에 전달되는 부모에 의한 어린이 폭행사건은, 현대가정의 부모가 부모이기를 포기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어린 자녀에 대한 폭행사건을 접하면서, 왜 현대가정의 부모들이 부모이기를 거부하며, 자녀들에게 폭행을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가를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분명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친부모에 의한 어린이 폭행사건은 대부분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이의가 없다. 훈육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이루어지는 폭행 역시, 자녀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탐욕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A신학대학의 교수의 14살 된 자녀 폭행살해사건도,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교회적 위치를 지키기 위한 탐욕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아이의 마음을 알았다면, 최소한 살해까지 가는 극단적인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깝다. 이 아이는 엄마가 죽은 이후, 새엄마와 아빠의 사이에서 갈등의 연속된 삶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이 대학교수는 아이를 아이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의 행동은 자신의 화려한 학벌과 직책에 걸 맞는 행동을 요구했고, 부모는 자신을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해 폭행으로 일관했을 것이다.

자녀의 살해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대학교수의 끝없는 욕망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결과를 초래했고, 14세의 자녀가 부모에 의해 살해당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대학교수가 욕망의 무게중심을 내려놓고, 자녀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감정을 조금만 이해했더라면, 아니 자신의 무게 중심을 자녀에게 두었더라면, 이와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안타깝다.

분명 부모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죽임을 당한 14살 소녀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 이외에도 우리사회에서 일어나는 부모에 의해 일어나는 아이학대 및 폭행, 살해사건은 모두 부모이기를 포기한 탐욕에 길들여진 결과이다.

최근 짐 뉴하이와 엘리제 핏츠패트리 저인 <부모이기를 포기하지 말라>가 이영란과 신보경에 의해 번역돼 서점에 나왔다. 이 저서는 성인자녀와의 관계에서 성공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지만, 제목은 오늘 부모이기를 포기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 저서가 자신의 탐욕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상처를 받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쓰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제목에 감동을 받았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훈육이라는 이름아래 부모에 의해 많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아이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아래 인격이 형성된다. 이렇게 사랑을 받아야 할 오늘의 많은 아이들은, 부모의 만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에게 자문해 본다. 또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둔 부모에게 묻고 싶다.

아이를 둔 부모는 부모이기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서의 진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아이를 사랑했으며, 부모는 생명을 이어주는 생명의 근원이다. 때문에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움을 당할 때, 함께 아파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아이를 폭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마음껏 사랑을 준다. 따라서 아이의 인격은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모들이여 부모이기를 포기하지 말자.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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