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1907년 한국교회가 체험했던 영적인 감동을 대부흥운동이라고 호칭하는 것은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과 증언에서 나오는 내용이었다. 감리교 선교사 노블(Mattie W. Noble)은 평양대부흥 운동의 회개 기도와 화해 운동이 나타난 것을 설명하면서, 머리에서 이루어진 회심 (head conversion)이 점차 가슴에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슴의 회심 (heart conversion)이라고 정의하였다.

체계적인 성경공부와 성령의 감화 감동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 평양대부흥 운동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다른 어떤 요인보다도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것임을 더욱 더 소중하게 기억하고 파악하는 것이 평양대부흥 운동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새뮤얼 모펫의 증언을 비롯해서 이 부흥운동의 현장을 지도했던 분들의 지적을 잊어버리거나 왜곡해서는 안될 것이다.

1890년대 이후로 지속적으로 성경말씀을 공부하고 깨우치는 학습반과 집중 성경학교가 열렸고, 곳곳에서 성경을 새롭게 접하게 된 영적인 감동이 지속되어 내려오던 중에 평양에서 열리던 저녁에 큰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성경은 선포자들을 통해서 심령에 복음이 메아리치게 하였다. 이런 집중적인 성경공부는 1901년부터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각 지역교회에서 가르치고, 중요도시에서 연합해서 학습하다가, 노회 주최로 모였다. 새뮤얼 모펫 선교사를 필두로 이런 성경 공부반을 인도하였으며, 솔라투 선교사는 한국교회 선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은 바로 성경에 기초한 저녁 사경회라고 지적하였다.

평양 대부흥 운동의 전조는 이미 1905년 초 성경사경회에도 나타났었다.

“음력 11월 20일 (양력 1904년 12월 26일) 경에 평양 야소 교회당에서 성경공부를시작할 제, 황해도 평안도 양 도의 일반 교인들이 구름같이 모였는데, 그 시에 착한사업에 경영이 많아 회당교회는 날마다 왕성한다 하더라”

부흥의 물결은 계속해서 그 후로 몇 달 동안 퍼져나갔다. 1907년 2월, 평안도 석암에서는 사람을 때려죽인 살인죄를 고백하는 성도가 있었다. 회개운동은 교파를 초월하여 감리교회에도 들어갔고, 기독교 학교와 성도들의 모임을 통해서 확산되어 나갔다. 1907년 봄에 길선주 목사는 서울에서 개최된 경기도 사경회에서 설교하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대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각 지역 교회에는 새로 밀려들어오는 성도들의 행렬이 계속해서 가세되었고, 기존의 성도들도 새로운 중흥을 체험하여서 대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2. 새벽기도의 회개와 백만명 구령운동

국교회의 신앙 유산 가운데서 가장 일상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새벽기도 모임이다.

나는 한국교회 최초의 새벽기도회 소식을 “코리아 미쎤 필드” (1909년 11월호)에서 직접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상세히 소개한 선교사의 생생한 첫 보고의 글을 접하게 되었다. 최초 새벽기도회의 감격을 전하여 준 사람은 당시 평양신학교 교수이면서 마포삼열 (새무얼 모펫) 선교사와 함께 평양에서 사역하던 스왈론 선교사였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1909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은 자신의 마음이 차갑게 되었다고 느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고, 냉랭해지며, 열정이 감퇴했다고 생각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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