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우리가 평화롭게 살 때, 백인들은 우리를 호전적이라고 떠들어 댔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불렀지. 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야만인이야. 이걸 봐. 백인들은 이 머리장식 깃털을 전쟁보닛이 라고 불러, 물론 우리는 전쟁 때도 이 모자를 사용해. 하지만 이 모자는 평소 의례에서 사용하는 거야. 전쟁 때가 아니라고, 각각의 깃털은 그 사람의 훌륭한 행위를 상징하지. 내 모자에는 독수리깃털이 모두 36개가 달려 있어. 이것은 결코 전쟁용 모자가 아니야.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는 모자일 뿐이라고! 또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백인들은 그것을 전쟁노래라고 둘러댔지. 하지만 그것은 전쟁노래가 아니야. 그저 신에게 바치는 기도일 뿐이야. 알겠지만 우리는 북을 치며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 그런데 백인들은 우리의 북을 전쟁북이라고 불러, 그것 역시 전쟁용이 아니야, 신과 대화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전쟁북 같은 건 없어. 그것만이 아니야, 우리 전사들이 얼굴에 붉은 칠을 하면, 백인들은 그것을 전쟁질이라고 불러, 그 칠은 전쟁용이 아니야. 우리가 죽었을 때 신이 우리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게 해드리기 위한 표시일 뿐이라고! 죄다 이런 식이야. 생각해보게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백인들한테 이야기할 수 있겠나. 아는 거라곤 전쟁밖에 없는 사람들한테 말이야(출처 : 지혜는 어떻게 오는가)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이전 의 인디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신을 섬겼기에 기독교 국가의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아도 된다는 정당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부르짖는 기독교인들은 원주민들을 학대. 학살 등의 공포로. 지배해 왔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서 유럽인들을 마냥 존대 할 수많은 없다. 본시 그들의 조상들 역시 야만족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지금의 미국 땅 등에 진출하여 정복자로 굴림하지 않았다면 세계의 지도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언제나 정복자들의 가는 길에는 평화를 내세운 전쟁과 학살 강탈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의 영토 또한 다를 바 없었다. 그들에게는 지금까지도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며, 남북전쟁의 피도 흘렸다. 그 전쟁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역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곧 많이 가진 힘 있는 자들과 가지지 못한 힘없는 자들 간의 전쟁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물론 가진 자들은 항상 평화와 행복을 내세웠지만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이들은 지옥의 고통 그 자체였다. 따라서 이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었지만, 결국은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많이 갖은 것을 나누기 싫어하는 힘 있는 자들로 인하여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도대체 그 삶이 어떠한 삶이란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세월호’ 등은 물론 여러 가지의 아픔들이 잔존하기에 그 아픔을 품에 안고 몸부림 치고 있는 이들을 향해 “아직도?”라는 말 등으로 비아냥거리는 이들을 보게 된다. 힘 있는 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하려고, 힘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들을 무시, 격멸하는 행동. 교회가 크고, 교인이 많고, 미국 등에서 유학하는 등 가진 것이 많기에, 작은 교회라고, 힘없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목사라고, 내려다보거나 무시하는 태도 등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동이 아닐까? “예수 믿어라! 예배하라! 기도하라!” 등을 외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란 말인가?” 그런 외침은 김일성의 어린 시절은 물론 박태O. 김OO, 이OO, 장OO 등 이단 사이비들도 하지 않는가?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기만지 말아야 한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 25:45) 한국장로교신학 학장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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