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그는 이미 2년 여 전, 1907년 1월 15일부터 일어난 평양대부흥 운동의 현장에서 모든 사람들이 눈물로 죄를 회개하는 성령의 감동을 체험한 바 있었다. 가슴을 쥐어짜면서 통회 자복하던 놀라운 현장을 가장 감동적으로 체험한 분이 바로 길선주 목사였다. 그 평양대부흥 운동은 모든 한국교회를 감동시켰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앞 다투어서 성령의 불길이 붙었었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2년이 지난 후에는 차츰 마음이 냉랭해지고 말았다.

나는 마포삼열 선교사와 함께 한 길선주 목사의 사진을 볼 때마다, 근엄한 노인을 발견한다. 길선주 목사는 항상 삿갗을 쓰고, 흰 도포를 차려입은 점잖은 선비의 모습이다. 그는 이미지는 매우 단호하고 엄격한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속사람은 전혀 달랐다. 그는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그리워하였다.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는 출석교인이 약 2-3천명에 도달할 정도로 대부흥을 경험하고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또 다른 갈망을 품고 있었다.

길선주 목사님은 마음 속에 사랑이 식어져 버렸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서,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 길 목사님은 가까운 장로님 한 분과 함께 둘이서 열심히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두 어 달 동안 기도하는 중에 소문이 퍼져 나가서 다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예 새벽 4시 30분에 모두 모이라는 초종을 치고, 5시에 성문이 열려서 통행이 시작하게 되자, 무려 7 백 명의 성도들이 참여하였다. 길선주 목사님은 다시금 영적인 감동을 회복하기 위해서 회개기도를 주도하였고, 영혼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충만케 되기를 갈망했다. 그냥 습관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새로운 열성을 회복하는 새벽기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매일 같이 올려지는 기도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새 힘을 얻었고, 성령의 역사는 지속되었다.

이 소식에 접한 서북부 선교사들은 즉각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새벽기도회의 전개상황을 전도와 선교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더구나 스왈론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광고하였다

“여러분들의 교회에도 이와같은 문제가 있으면, 길선주 목사님이 하고 있는 이 새벽기도의 방법을 채택하시오”

한국의 새벽기도는 이 때부터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 그냥 하는 기도의 습관이 아니었다. 생명이 충만한 현장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전도의 열심히 일어나는 부흥의 시발점이었다. 무관심과 냉랭함을 씻어버리는 치유와 회개의 역사를 일으켰다. 평양 장대현 교회의 새벽기도 부흥은 마침내 놀라운 결실을 맺게 되었다. 바로 다음 해 1910년, “백만명 구령운동”을 구호로 내세우고 대대적인 전도운동에 열정을 다 바쳤다. 일제하에서 나라를 빼앗기면서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희망을 찾게 되었다.

은혜는 지속되어야 하고, 심령의 부흥도 계속되어야 한다. 뜨거운 성령의 체험과 은혜를 체험하였지만, 지속적으로 간직하는 것은 쉽지 않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평양은 양국 군인들 수 만명이 죽고 다치는 피바다가 되었다. 약 10년 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10년 강제합병을 이루기까지 조선은 무기력한 정치인들로 인해서 불안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놀라운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던 것이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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