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수 강 목사

얼마 전 메스컴과 인터넷은 북한 5차 핵실험에 대해 비중을 크게 다루었다. 핵전문가들의 입을 빌리면 결국 핵을 가진 나라는 핵을 가지지 못한 나라를 지배한다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과 핵보유를 놓고 대한민국 여당과 야당은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삼권분립이 분명한 민주국가에서 국회의장이 국회개원 의장 연설에서 행정부의 사드배치에 대해 비판하자 여당의원들이 국회개원식을 박차고 퇴장하는 일들이 벌어졌었다. 국회의장은 정치적인 중립으로 의사진행을 해야 하는데도 일개 의원으로 있을 때의 신분을 망각하지 못하고 망언을 함으로 겨우 개원한 국회가 살 어름 판으로 변하게 했었다. 그런 입법부 수장이 미국을 방문해 다른 태도와 궁색한 변명에 국민의 입장에서는 금년 국회 입법 활동에 우려 하는 바가 크다.

핵을 보유한 북한이 이제는 핵이 없는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마음대로 유린하는 단계가 되었는데도 대중들의 인기가 있는 학계의 유명한 교수가 대놓고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배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은 잘 했는데 실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국론만 분열시키는 어리석은 행동에 대한민국 국민이 맞는지가 의심이 든다. 과거 불란서가 핵을 만들겠다고 할 때에 미국이 전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불란서는 만약 프랑스가 핵으로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이 책임을 지겠느냐고 하자 한발 물러섰고 프랑스는 핵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힘이 약하면 힘을 가진 자에게 약한 자는 끌려 다니게 되는 것은 약육강식의 법칙이다. 핵 전문가들에게 의하면 핵을 가지면 핵을 가진 자들끼리 불안하지만 서로 대등하게 평화가 존재 할 수 있지만, 핵을 가지지 못한 자는 핵을 가진 자에게 종속된다는 원리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핵은 평화로 사용하면 인류에 공헌하는 귀중한 자산이지만, 핵을 잘못사용하면 인류가 공멸을 자초하는 대단히 무서운 무기다.

북한은 위협조로 입으로 협박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5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앞으로 세 차례 더 실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서방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4차 핵실험 때와 미사일 발사 때와 같이 입으로만 원점타격, 킬 체인, 레임체인지(체제교체), 평양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엄포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야권과 진보세력들은 국가가 북한으로부터 핵전쟁 위험이 일촉즉발인데도 대한민국에 살면서 대한민국의 안보보다는 북한의 의도에 맥을 같이 하고 있는듯해 안타까운 모습이다. 국민의 대다수는 국가의 생존을 위해 대등한 핵 억지력을 갖추자는 의견인데 정치권은 홀로 평화, 비핵화만 주장하는 안보불감증에 불안해하고 있다. 북한은 핵을 금방이라도 남한을 향해 발사하는 태도인데 남한은 국회에서 논의를 거처야 한다고 한다. 이는 정치권의 생각과 국민의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지진 안전지대라고 하던 대한민국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다. 초당적으로 대처해야 할 국가적인 재난에 역시 정치권은 정쟁으로 누구를 탓하는 모습이다. 이러다가 국가가 북한의 핵 공격과 지진으로 마비상태(?)가 되어도 정치권은 역시 정치논리로 공방할 것 같아 정치인들에 대한불신만 점점 더 높아 갈뿐이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의 종교계 특히 기독교는 어떤 모습인가? 핵위협에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는 가운데 지진공포가 덮쳐 위험이 가중되었는데도 이렀다할 반응이 없다.

교회가 세상에 왜 필요한가? 국민들이 어려움을 격고 불안해하며 공포가 엄습한 가운데 수십 명이 사고로 중경상을 입고 수천 건의 재난 사고가 났는데도 교회는 이렀다할 반응도 없이 정부에 미루고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어디로 가고 교회의 재정적 구호의 손길은 어디로 갔는가?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의 경재부흥에 따라 함께 성장하였는데 사회가 어려움을 격고 있는데도 아무 대책도 없이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 누가 교회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며 교회가 최종적인 피난처로 생각하겠는가?

남한은 지진, 북한은 홍수로 수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한국교회의 생각이 어떤지? 성경에 계시된 초대 교회는 사회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자들이 물밀듯이 교회로 유입될 때에 성도들은 자신들의 집과 밭 그리고 크고 작은 부동산을 처분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다. 사도들은 그 재물을 당시 과부와 고아와 생활이 어려운 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준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다. 교회는 초대교회 때나 현대나 다르지 않다. 교회의 존재는 국가나 백성들이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는 실제 교회가 도움이 되어야 한다. 금년 선출 된 신임 교단장과 임 역원들은 정치보다는 교회 본래 모습을 복원했으면 한다.

필운그리스도의교회 담임/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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