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 내내 잘려나간 시간들이
비로소 강물로 이어지고
그 위에 당신이 실려옵니다
사랑의 눌변을
우황으로 앓던 그 세월
이제야 놓임 받아
내 영혼의 빈 잔에
들어와 눕습니다
수화(手話)로만 통하던 먼 하늘
이 시간 낙엽이 흩날리지만
갈수록 투명해지는 나의 청력
내 안에 고여 있는 샘물,
아 당신이 길어가는 소리
어제도 오늘도
당신이 길어가는 소리

 

 < 『진안문학』 22호에서 발췌>

* 허소라 시인: 전북 진안 출신. 『자유문학』 시 등단.
군산대학교 명예교수. 석정문학관 초대관장.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전회장
전북문화상 등 다수 

▲ 정 재 영 장로
 시는 과학적 진술어를 가급적 피하고 상상력을 통해 창조된 언어를 동원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론에서 이 작품은 시가 관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이론을 납득시키는데 좋은 예시가 된다. 예를 든다면 기도를 ‘수화(手話)로만 통하던 먼 하늘’라고 표현하고 있는 부분 등이다. 기도를 손을 모은 모습으로 치환하고 있는 기술이 예술이 되게 해준다. 왜냐면 기도라는 말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기도를 수화로 변용함이 곧 그것이다. 시인이 천상적인 이미지를 지상적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성경에서 예를 든다면 로고스라는 본질적인 관념이 지상적인 인간의 몸으로 보여준 사건을 성육신이라 말한다. 이처럼 시는 관념의 육화를 형상화작업이라 하고, 이것이 시의 생명이 된다.
이런 전제에서 이 시에서는 의도적으로 미학성을 강조한 부분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사랑을 가슴에 품고 가슴앓이 하는 모습을 ‘사랑의 눌변을/ 우황으로 앓던 그 세월’이라 표현한 부분이나, 나이가 들면 난청이 되는 일이 순리지만 화자는 더 잘 들리게 된다고 역설적으로 말하는 ‘갈수록 투명해지는 나의 청력’의 부분에서 시적 탄성이 극대화 되고 있다. 물론 역설적인 진술은 겉으로는 모순이다. 그러나 나이와 달리 가을이라는 인생의 계절에는 하나님의 소리가 더 잘 들린다는 내용처럼, 모순을 통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시의 형태인 것이다. 또한 ‘내 안에 고여 있는 샘물,/ 아 당신이 길어가는 소리’도 하나님과의 반응을 보여주는 시어다. 샘물은 인간의 깊은 영혼의 소리다. 길어간다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가 잘 상달된다는 말이다.
이 작품은 청각과 시각과 촉각 이미지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현대시의 미학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백에 급급하여 간과하기 쉬운 기독시인들에게 신앙시도 미학성의 바탕 위에서 예술이 된다는 정의를 확실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작품이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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