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가 방향성을 잃고 헤매고 있다. 과거 민족의 희망이었던 이 땅의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외면받은 이유는 단지 일부 목회자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자기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배타적인 공동체 안에 갇힌 것이다.

초기에 기독교는 천막교회에서 하는 부흥집회에도 구름떼 같은 군중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곤 했다. 병고치고 예언하는 성령의 역사가 가득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 부흥집회가 목표성과 순수성을 상실한 순간부터 은사적 역사가 떠나고 모이는 사람 수도 줄었다. 성령의 은혜를 교회 건축 또는 헌금 거두기 위한 목적으로 바꾼 대가는 혹독했다.

한국교회는 지난 1세기동안 받은 은혜와 은사를 사회적으로 나누는 일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인이 늘어나면서 외형 확장에 주력하게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보유한 자랑스런 역사를 갖게 됐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교회가 수도 서울뿐 아니라 지방 도시에도 즐비한 한국교회의 대사회적 신인도는 반비례하고 있는 실정이다.

1919년 3.1만세의거 때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 지도였다. 당시 인구에서 기독교인이 1.3%였는데 투옥돼 재판 받은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17.6%였다면 그 당시 사회 민족운동에 기독교의 역할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참가하면서 엄청난 수난 가운데 순교자까지 배출했다. 그러던 한국교회가 일제 말기에 탄압이 심해지자 황민화정책 및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등 부일에 앞장서게 된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부터 1939년까지 ‘전승축하회’ 604회, ‘무운장구기도회’8953회, 시국강연 1355회 등을 열고 국방헌금을 바친 데 이어 1942년엔 육군과 해군에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7정의 거금을 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540개의 교회 종을 떼어 바쳤다.

일제말기 한국교회의 변질과 부일 협력은 일제의 외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의 협력이 없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세속의 권력에 영합하고 추종한 행위로 기독교인으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큰 죄악이었다.

8.15 해방 이후에는 독재정권에 야합하는 숱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한국 기독교가 친일반민족 행위에 그치지 않고 독재정권과 유착한 것은 죄책 즉, 친일 역사에 대한 죄악을 회개하거나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기독교는 일제와 독재정권에 유착하면서 교세 확장과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종교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고 한경직 목사는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는 템플턴상 수상 축하모임에서 “나는 신사참배를 한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해 충격파를 던졌다. 그 후 교단 차원에서 2006년 기독교대한복음교회가 처음으로 친일 행적을 사죄한데 이어 2007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총회가 신사참배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같은 해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참회했고, 2009년 예장합동과 통합, 기장, 합신 등 4개 장로교단이 신사참배 참회기도를 했다.

기독교는 고난과 순교 그리고 회개의 종교다. 그러나 역사의 죄책을 외면한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이 새로운 신사인 배금주의에 빠져 세상의 부패를 빰칠 정도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구원과 영생을 외치는 기독교가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리며 약자가 아닌 불의의 편에 선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