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같은 연단의 세월

보름만에 올린 결혼식
가끔씩 학교와 시내버스 안에서 본 얼굴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동기 전도사가 오기로 되어 있다가 오지 못할 상황이 생겨서 나를 대타로 불렀다고 했다. 얄팍한 내 자존심에 구김살이 생겼지만,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때 알게 되어서 그 교회 청년부 토요 집회에 가서 간증을 하게 되었고, 며칠 후에 간증 테이프를 전해 준다고 해서 응암동에 있는 어느 빵집에서 만났는데 성령께서 생각지도 않았던 뜨거운 감동을 주시면서, ‘저 여자가 네 짝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 내 속에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께 속으로 또 물어보았다.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은 변함이 없었다. ‘저 여자가 네 짝이다’라고 하셨다. 세 번째 성령님께 물어 보았더니 똑같은 감동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이 짝이라고 합니다. 결혼합시다. 하고 청혼을 했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한 채,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며칠 뒤에 그쪽 부모님을 만나서 동의를 받은 다음에 처녀를 데리고, 시골에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서울에 올라와서 둘이서 급하게 준비해서 보름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내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급하게도 가정을 꾸려 주셨다.

나는 양복 두 벌을 맞추고 시계, 반지는 할 생각도 않고 차고 다니던 전자시계를 7,000원 주고, 시계 광내는 집에서 닦은 다음 찼다. 얼마 못 가서 버렸지만 당시에는 새 것처럼 보였던 시계였다.
결혼식을 준비할 때 신혼 첫날을 한얼산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약속대로 시외버스를 타고 한얼산 기도원으로 찾아가 짐을 풀고 캄캄한 밤중에 잣나무를 붙들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평생 지키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당시 내 마음으로는 신혼첫날을 그렇게 보내는 것이 당연했지만 불평 없이 따라주었던 신부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정상적인 처녀와 총각이 결혼했는데 신혼 첫날밤을 청바지 입고 지낸 우리가 진짜 정상적인 사람인지 가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우리의 인생길에 있어서 주님이 주신 은혜의 간증거리가 되었다.

1000일 작정 기도회를 통한 실제적인 역사

제1차 1,000일 작정 기도회((1987.1.1.-1989.9.30.)
신혼여행을 갔다 온 후에 부천시에서 한참 떨어진 원종동 어느 시골 같은 동네인데, 그것도 부르크로 벽을 쌓고 스레트로 지붕을 덮은 집에 방 한칸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신혼 둥지였다. 생소하고 어설픈 방이긴 했지만, 산 속 동굴에서 기이하게 살던 터라 호텔보다 더 넓고 좋아 보였다. 신혼살림 시작할 때부터 저녁식사가 끝나면 아무리 늦어도 교회에 가서 부르짖고 기도했다. 5월 중순에 결혼해서 그해 10월에 구로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간 그날 저녁부터 기도처를 찾던 중 동광교회가 보이기에 침낭을 하나씩 가지고 가서 기도하고 의자에서 잠을 잤다.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도대체 누구기에 젊은 부부가 밤마다 와서 기도하고 교회에서 잠을 자는지 궁금해했다.
동아교회 담임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