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 재 형 목사

사람들은 각자의 확신에 따라 살아갑니다. 만약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곳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투자하지 않는 이유는 진정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확신하고 거기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저 취미 생활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라면 신앙인 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확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전 인생을 투자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것이 정말 가치 있다고 믿습니까? 물론이죠! 그렇다면 그곳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아니요” 이런 사람은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모든 삶을 투자했습니다. 그것이 영원히 남는 가치 있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볼 때 성경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행동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인 줄 알고 믿느냐 잘하였도다 사단도 믿고 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실체요, 확신이요, 신뢰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말은 하면서도 거기에 안식하지 못한다면 그런 자들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 불신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질적으로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들이 아버지께 가서 컴퓨터를 사달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컴퓨터를 사주기로 약속했다면 아들은 그것을 믿고 기뻐 뛸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틀림없이 사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부터 기뻐 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실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대로 내가 믿노라 라고 한다면 그것은 큰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모든 약속을 말하는 것이며,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을 우리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것처럼 즐길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거기에 투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믿고 살아가는 이유는 우리가 큰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옵니다.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옵니다. 그런데 이 시험이 왔을 때, 어려움이 왔을 때에 그 사람의 믿음의 본질이 드러나게 됩니다. 유능한 선장은 풍랑이 일고 파도가 칠 때 알아봅니다. 용감한 군인은 총알이 지나가고 포탄이 지나가는 전쟁터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정말 성숙하고 믿음 있는 그리스도인은 시험이 오고 환란이 올 때 알아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견고한 믿음 가운데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시험을 하십니다. 요단강이 가로막고 있는 이유는 약속의 땅 이스라엘이 가까워 졌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절망이 아니고 희망인데 그 희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을 보는 사람은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여리고 라는 견고한 성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이유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이 편안하지 못한 길을 간다할지라도 약속을 따라서 믿음이 진보되는 방향으로 살아갈 때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자리에 거한다는 사실을 있지 않아야 됩니다.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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