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 한국교회의 순교신앙과 혼란스러운 계승작업

한국교회가 체험한 신앙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가장 중요하게 형성된 사상은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와 고난을 이겨내면서 희생을 감수하는 순교신앙이다. 비록 다 순교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일사각오의 신앙을 보여준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사화는 교단과 교파를 초월하여 받아들이는 한국 기독교의 기념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신학사상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기존의 권세와의 충돌에서 이겨내는 “순교신학”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는 원래 출발부터 이미 지배해오던 권세들과 종교세력들과의 대립과 충돌을 피할 수 없었고, 긴장 속에서 출범했다. 예수님과 사도들을 비롯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은 권세자들의 핍박 하에 순교와 박해를 이겨내면서 믿음의 인내와 시련을 지속해 나갔다 (행 6장, 12:12).

1939년 9월 9일 제 27회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수용하기로 결의했다. 일본 총독부의 집요한 정치 공작이 진행되어서 예배당에 일본국기를 계양하는 탑을 세울 것, 국기에 대한 경례, 동방요배, 일본국가 봉창을 강압하면서 교회에 대한 박해를 가했다. 선교문, 기도문, 찬미가 등 예배의 중요요소들을 모두 검열하였고, 일본에 적합한 종교로 만들고자 ‘야소교 거널운동’을 획책하였다. 이미 1938년 2월 9일 평북노회가 6월 8일에는 전남노회가 8월에는 평양노회가, 9월 초에는 경안노회가 각각 결의했다. 이미 총회직전까지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했다. 또한 장소를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바꾸어서 감시에 만전을 기했고 총대원 187명의 좌석 전후에 97명의 경관을 배치시켰고, 무장한 경찰들로 회의장을 연금하다시피 삼엄한 분위기를 만들어놓았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은 검속대상자로 분류하여 아예 총대명단에서 삭제토록 하였다. 총회로 모이는 날에는 극심한 협박 하에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이 안건이 가하면 예! 하십시오”라고 통과시켰다. 서기 곽진근 목사는 미리 준비한 신사참배를 지지하는 성명서을 낭독했다. 즉시 실행하자는 긴급동의안이 채택되어서, 부총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하에 23명의 총대원이 평양신사를 참배하였다. 선교사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였지만, 임석한 일본 경찰관이 회의록에 기록하지도 못하게 했다. 태양신과 일본 현재의 천황을 신으로 숭배하는 배교와 우상숭배를 결의하게 된 것이다.

12월 12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 홍택기, 부총회장 김길창은 감리교회 양주삼, 이종우, 성결교회의 이명직 등과 함께 일본에 직접 가서 천황신을 섬기는 이세신궁, 가시하라 신궁에 참배를 하고 돌아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도 기존의 종교세력과의 갈등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개신교 (protestant)라는 말은 1529년 츄파이어에서 개최된 신성로마제국 의회에서 당시 권력에서 소수파로서 “항의서” (Protestatio)를 발행한데서 유래한다. 로마 가톨릭과 지존의 왕국 통치자들이 가해오는 살상, 체포, 추방 등에 맞서서 우상숭배에 배교에 강력하게 맞섰다. 로마 가톨릭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개신교 성도들을 살상했는가에 대해서는 미사를 거부하였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희생과 헌신의 기록에서 발견된다. 1572년 대학살로 인해서 20 만 명 가량이, 도합 2 백만 여명이 고난을 당하였다.

개혁주의 신앙을 물려받은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도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와 이교숭배의 강압 속에서 연단 받았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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