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2007년 1월 9일로 기억한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4년제 중임을 골자로 하는 '개헌 제안'을 제시하자,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은 "참 나쁜 대통령이다. 국민이 불쌍하다. 대통령의 눈에는 선거밖에 안보이느냐?"고 일갈했다. 또 “이런 정략적 의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노 대통령의 제안에 대해 가급적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라고도 했다. 그의 “참 나쁜 대통령”은 당시 곤두박질치던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와 더불어 널리 회자되며 당시에 상당히 인기있는 유행어가 되었다.

그런 지 거의 10년이 지난 어제(2016년 10월 24일) 국회 국정연설에서 박 대통령은 대통령 발 개헌안을 단순히 제안이 아니라 추진계획을 포함하여 상당히 구체적이고 소상히 밝힘으로써 정가에 메가톤급 이슈를 던졌다. 지금 정가는 (좌)순실 (우)병우의 비선실세들의 스캔들로 국회가 펄펄 끓고 있고, 송민순 전 장관의 회고록에서 발발한 소위 유엔인권결의안의 대북결재 의혹, 그 외의 잡다한 산적한 이슈는 물론이고, 한진을 필두로 삼성 등 휘청거리는 경제며, 물류대란을 예고하는 파업에, 백약이 무효인듯 보이는 북핵 문제와 코 앞에 닥친 미국의 대선을 포함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외교적 사안들이 산적한 가운데 느닷없는 대통령의 개헌 발의에 당황하고 있다.

물론 제안의 배경에는 야당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개헌의 당위성이 있다. 여론과 당위성이 모두 개헌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제안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년 예산을 설명하는 국정연설에서 던진 개헌 폭탄은 그야말로 불랙홀이 되어 모든 정가의 이슈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필자도 개헌에 동의하며 시대적 변화를 담지할 수 있는 훌륭한 헌법을 국민적 합의를 거쳐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중차대한 제안이 국민 앞에 던져지기 전에 박 대통령이 고려해야 했을 최소한의 일들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최소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엄정한 수사와 우병우 수석의 국회 출석을 포함한 그들의 처신을 말끔하게 정리한 이후에 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만일 대통령이 이런 모든 문제들을 덮어버리고 나아가 임기 후반기의 레임덕 방지와 국정장악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던진 제안이라면 정말 나쁜 대통령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개헌 제의는 대권을 향해 달리는 잠룡들과 정당들로서는 피해갈 수 없는 이슈이기 때문에 이것 말고 다른 사안들을 다룰 시간이나 여력이 없다. 즉 야당이 개헌을 제쳐두고 최순실과 우병우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 수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참 나쁜 대통령이다. 비판적 지지자였던 필자가 느끼는 감정이 이러한데 보편적 국민들이 바라보는 느낌은 어느 정도일까? 일에는 선후가 있는 것이고 천하의 주도권은 명분에 있다. 그러나 지금 대통령의 개헌 제안은 순서상 선후도 틀렸고, 선명하다고 생각되는 개헌의 명분도 취약하게 만들어 버렸다. 국민들은 당연히 개헌은 해야 하지만 개헌 이전에 대통령이 선결해야 할 것이 있다는 데 동의함으로서, 개헌발의 이전의 처분을 요구하는 명분이 개헌의 당위성을 앞서고 있다. 이 역시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필자는 어려운 시기를 뚝심과 소신으로 버티는 대통령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몇 년 전 총장 시절 청와대 영빈관에서 10미터 앞에서 본 대통령의 근심어린 얼굴이 안타까웠고 잊을 수 없다. 어떻게든 성공한 대통령으로, 그 헌신의 결과가 후세에 제대로 평가되기를 소망하면서도, 적어도 이번 개헌발의는 명분과 실리에서 모두 패착임을 안타까워한다. 어떤 두려움이 이런 오판을 가져오게 했는지 모르지만 참모들은 반성해야 한다. 참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나 참 나쁜 대통령이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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