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재 성 교수

개혁주의 신앙을 물려받은 한국 초대교회 성도들도 역시 일본의 제국주의 통치와 이교숭배의 강압 속에서 연단 받았다. 한국 기독교는 무지한 자들의 곡해와 압제자들의 탄압과 말살정책 속에서 분투노력하였고,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서 힘든 시련을 당해야만 했었다. 이것은 한국 성도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고난의 신학”이요, “성육신의 신학”이며, 루터와 칼빈이 말하는 “십자가의 신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첫째, 평양신학교에서부터 형성되어서 내려온 한국장로교회의 신학사상은 철저한 말씀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이다. 이것은 평양신학교 설립자 새뮤얼 모펫의 영향력으로 형성된 것이고, 정통 칼빈주의 신학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일부 카나다 선교사들과 소수 선교사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하게 되는 일본유학파들의 자유주의 신학, 진보주의 사상에 기울어진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등장하게 되면서 순교의 의미와 저항 신앙의 계승에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존귀히 여김을 받았고 ‘출옥성도’들마저도 추앙을 받았지만, 박해의 시대가 지나가고 난 후에 교회지도자들의 행동과 결정들은 혼란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대해서 회개운동을 전개하면서 분열되어진 역사를 살펴봄에 있어서 정말로 객관적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란 전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는 1940년대의 혹독한 핍박과 선교사들의 추방, 그리고 해방 직후에 펼쳐진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서 직접 체험한 세대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당시에 생존하였던 김양선 교수가 쓴 「해방후 한국교회 10년사」를 매우 중요한 객관적 사료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한국교회가 일제 36년의 강점기에 치러야 했던 신사참배에 관련된 해석들과 해방 후에 분열하는 과정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초기 선교사들은 일제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자 배교하는 것으로 거부하고 “평양신학교”가 1938년에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카나다 장로교회 선교사들은 일본과 마찰을 하지 않고 학교를 계속 운영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들과 신학을 공유하던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수용하는 자들이 서울에 김재준, 송창근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신학교”가 설립하였다. 순교정신과 철저한 성경중심의 신학과는 거리가 먼 자유주의 노선이 전수되어지기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근본원인이다.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그 벅찬 희열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말았다. 해방 직후 한국교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신학교로 인준하게 되면서 신학적인 충돌이 발생하고 말았다. 조선신학교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김재준 교수의 주도하에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에 맞서는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1948년 6월 개교하였다. 이 학교의 신학생들마저 성명서를 발표하고, 총회가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통을 겪다가 1952년 37회 총회에서 김재준 교수를 제명 처분하면서,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졌다. 한국동란이라는 비극적인 동족 상쟁의 와중에서 한국교회는 더 비참한 분열의 고통을 겪었다.

둘째는 신사참배를 문제를 회개하면서 교회를 재건하는 방법과 주체를 놓고서 당시 교계지도자들이 서로 갈라서는 교단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신사참배를 찬성했거나 동조한 목사들과 장로들의 복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계속>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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