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인간의 역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아도 어떻게 보면 단순하다. 그 시대에 강자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달라질 수 있다. 강자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약자에게는 무관심하거나 억압하는 나라는 좋은 나라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롬 15:1)고 했다. 구원의 복음은 항상 약자에 대한 태도에 있음을 강조한 말이다. 성서가 하나님의 인류 구원 섭리를 말할 때마다 약자인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킨 사건을 되새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신 10:17-19).

그리스도인은 항상 남을 배려해야 한다. 특히 약자를 배려해야 한다. 삶의 목적이 자기만족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이 가르치는 사람다움의 기준이다. 사회 제도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다. 목회자의 설교가 진정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면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럴 경우 자연스럽게 약자를 억압하는 세상과 권력에 대해 비판을 하게 된다. 현실은 어떤가? 한국교회는 의례적으로 약자를 입에 올리기는 하지만 사회 제도를 말할 때는 약자보다는 항상 ‘국가’라고 하는 강자 편에 선다. 이는 교회가 ‘번영’ ‘승리’ ‘성공’의 신화 등 강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기보다 어린 예수를 향해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 3:30)고 했다. 예수께서 추구하는 복음의 세계 곧 약한 자를 극진히 보살피는 세계는 더욱 흥해야 하지만, 약한 자를 억압하는 율법적인 세계는 소멸해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은 흥해야 하고, 율법은 쇠해야 한다. 내 속에 복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약자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살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더 나아가 약자를 향한 구원의 복음을 ‘세계 인류’에게로 확장시킨다. 성경이 말하는 ‘비전’이 그러하다. 우리 시대가 유별나게 ‘성공’ ‘번영’에 대한 강박과 함께 공동체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음은 무엇을 말하겠는가. 약자의 탄식을 외면한 것은 복음이 아님을 이 땅의 교회는 깊게 되새겨야 한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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