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얼마나 황홀한가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은
잔고가 빈 통장처럼
또한 얼마나 쓸쓸한가
평생 달려왔지만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못하였네
가여운 내 사람아
이 황홀과 쓸쓸함 속에
그대와 나는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 문 현 미 시인
매화 가지에서 눈녹이물 설핏 흐르던 봄의 향기 아슴아슴하고 여름 산의 푸른 이마도 사라진 풍경이 되었다. 이제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11월이다. 언제 울긋불긋 화려한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낙엽들이 잔뜩 몸을 말아 올린 채 떼를 지어 다닌다. 황홀한 순간이 지나면 쓸쓸하기 그지 없는 허망이 찾아든다. 햇살을 한 몸에 받는 느티나무의 뒤쪽은 그만큼 긴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는가. 

 한 해를 돌아보면 잘 한 일도 있겠지만 후회가 되는 일도 따르는 법이다. 어찌 늘 웃고만 살 수 있으며 그렇다고 울기만 할 수도 없다. 울고 웃으며 우리는 성과를 위해 질주하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에서 현대인 스스로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고 갈파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그런 모순을 지니고 있다. 과잉을 향해 치달으며 나를 돌아볼 여유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피로는 점점 더 쌓여 간다. 사람다운 것이 무엇인지, 무엇이 전정 가치 있는 것인지 잊고 싶고 아예 잊고 살아왔다. 

 이런 가운데 시인은 살아 있다는 것을 되짚어보며 가을이 얼마나 황홀한 계절인지 느낀다. 하지만 황홀 속에 맞는 가을을 제대로 감상하기도 전에 주머니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아 차리고 만다. 차가운 바람이 쌩- 몰아치는 현실이다. 평생 달려와도 도착하지 못한 길 위에 서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 그냥 모든 것 포기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얼마나 오래 세상에 머물 수 있을까’ 고민하며 머뭇거릴 것인가. 손등과 손바닥이 영원히 마주할 수 없고 아무리 힘 주어 몸을 뒤틀어도 등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이게 삶이 지닌 어쩔 수 없는 면모이다. 시를 통해 시인은 가을과 삶이 지닌 양면을 공감하도록 자연스레 이끈다. 시를 빚어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바깥이 몹시 쌀쌀하다. 어디선가 언 손을 모은 성냥팔이 소녀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함께 잘 살아야겠다. 가여운 사람들이 줄어들 그날까지.

백석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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