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헌 철 목사

“ ~ 인간이 땅속 동굴에 갇혀 산다고 가정하세, 깊숙한 동굴은 빛있는 쪽을 향해 그 입구가 동굴 너비만큼 열려 있다고 하세, 인간은 그 속에서 어렸을 때부터 손발과 목을 묶인 채 꼼짝 못하고 있어 앞을 볼 수 있을 뿐, 고개를 돌릴 수도 없네, 그들을 위해선 저만치 뒤쪽 위에서 불이 타오르고 있고, 그 불과 이 죄수들 사이에는 높다랗게 길이 나 있다고 치세,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나지막한 담이 나 있다고 치세, 그 담은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자기네들 앞에 놓아두고 그 위로 인형들을 내보이는 무대와 같은 것일세.”
“우리 자신과 흡사하지. 즉, 그 같은 상태에 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건 상대방이건 자기네들의 정면에 있는 동굴 벽에 불빛으로 투영되는 그림자 이외에 뭔가 다른 것을 보았을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하나?”
“또 직접 불빛을 보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눈이 아픈 나머지 오히려 되돌아서 자기가 잘 볼 수 있었던 과거의 사물이 있는 쪽으로 도망치려 할 것이고, 그 편이 실제로 지금 지시된 사물보다도 훨씬 명확하게 보인다고 인정할 것 같지 않나?“

“또 만일 누군가가 그 땅굴 속에서 입구 쪽의 험한 통로로 힘껏 끌어내어 꼼짝 못하게 하며 햇빛이 비치는 곳까지 끌고 간다면, 물론 그는 괴로워할 것이고 끌려가면서 불평을 할 것이며, 막상 햇빛이 보이는 곳에 왔다 하더라도 눈은 빛으로 꽉 차서 진실이라는 것은 하나도 볼 수 없을 게 아닌가?”

“그러고 보니 위의 것을 보려면, 그곳 조건에 익숙해져야겠군, 따라서 처음에는 그림자가 가장 보기 쉽겠지, 그 다음에야 실물을 보게 될 테지, 이런 과정을 거쳐 하늘에 있는 것이나, 하늘 그 자체를 보게 되겠는데, 그것도 밤에 별이나 달빛을 보는 편이, 낮에 태양이나 그 빛을 보는 것보다 쉬울 걸세.”

“그러고 나면 태양에 대하여 이번에는 사계절이 생기고, 해가 바뀌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태양빛이, 그것이 미치는 범위내의 모든 것을 관리하며, 어떤 의미에선 자기들이 보아 왔던 지하 동굴 속의 온갖 일에 대해서도 모든 것의 원인이 되어 있음을 깊이 숙고하게 되겠지.”

“그럼,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는 애초에 살던 동굴 속, 그때 함께 지내던 친구 죄수들, 혹은 그곳에서 지혜롭게 여겼던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 신상의 변화를 자신을 위해 다행스럽다고 여기는 한편, 동굴 속에 남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겠나?”

“그렇다면 또 다음과 같은 점도 유의해 주개나. 만일 그와 같은 사람이 다시한번 동굴 속으로 내려가 전과 같은 자리를 차지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태양이 비치는 곳에서 갑자기 내려갔다면, 그의 눈은 암흑으로 꽉 찰게 아닌가?”(출처 :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 향연)

우리는 대한민국에 휘몰아치는 광풍을 얼마나 느끼고 있을까? 욕망의 동굴 속에 몸을 의지하고 있으니 광풍, 태풍 따위는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까? 무엇이 국민을 위하는 길이며, 무엇이 애국하는 길인지, 숙고하며 어둠 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그 속에서 지내는 것이 편안하다 만족하다 하는 자들은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다. 따라서 사계절의 비바람, 눈보라가 있다 해도 동굴 밖으로 나와야 한다. 각종 탐욕, 거짓, 사악 등의 더러운 어두움에서 나와 빛의 따뜻함을 누려야 한다. 따라서 “동굴 속에서 속히 나오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18:4)

한국장로교신학 학장•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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