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 인 찬 목사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 베드로 안에 내재하는 인간의 양면성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가 있다.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청난 고백을 서슴지 않고 했을 때,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흐뭇한 순간을 누렸다.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확인한 ‘이 때로부터’(마 16:21) 주님은 제자들이 예기치 못한, 당혹스러운 말씀들이 쏟아 내신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받으실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처음으로 공개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막아서며 힐문하듯 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탄아!" 하시며 매섭게 꾸짖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길을 막아서는 사탄의 도구가 된 데는 어떤 사유(思惟)가 있는가?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 십자가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깊은 감격 속에 자아가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어느 때 사탄의 도구가 될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다.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감격이 있는가?

나를 위한 십자가의 감격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의 정도를 걸어 갈 수 없다. 십자가에 대한 깨달음 없이는 주님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베드로는 왜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이다.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유추할 수 있다.

하나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에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사53:10) 그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마 16:21)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구절의 원문에는 반드시 해야 될 당위성, 필연성을 표현하는 ‘must’라는 동사가 쓰였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길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정치적인 희생물로서의 죽음도,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죽음도 아니며, 성자의 죽음도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죽음, 대속(代贖)의 죽음이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일반인이 이해 못할 역설이 있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은혜는 기쁘고, 행복하고, 편하고, 형통한 것들을 담고 있는 듯하다. 또 사랑, 기적, 깨달음, 부흥, 확장, 성취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는 당혹스럽고, 실로 이해하거나 쉽고 넉넉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속의 은혜다.

그 어느 때에 경험했을 법한 달콤하고, 몽롱한 은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다. 단언컨대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사 55:8)고 하신다. 다를지라도 그 십자가는 진정한 은혜다.

또 하나는 주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죄와 관계되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제일 먼저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다(눅5:8). 그러나 이것은 자기 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표피적인 것이었기에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도, 주님의 십자가의 이해도 충분하지 못하다.

베드로의 이 같은 한심한 단면을 보시고도 주님은 베드로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지금은 깨닫기에 충분하지 못하지만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그날, 베드로는 십자가를 분명히 보고 감격할 것이요, 녹아질 것을 주님은 아셨기 때문이다. 진실로 주님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십자가를 본 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는, 십자가의 감격을 가진 주의 제자가 되었다.

십자가를 대적하며 걸림돌로 살던 자가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을 뿐 아니라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역설의 진리가 통하는 세계다.
십자가의 은혜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은혜다. 이 십자가를 저주하던 자도, 십자가의 걸림돌로 살아왔던 자도,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로 살아온 자일지라도 모두가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자들이다.

주님은 그 어떤 성도라도 포기하지 않으신다.

성령이 우리마음을 열어 주시는 날, 드디어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십자가가 바로 나를 위한 십자가라는 사실 앞에 감격하게 될 것이다. 이 감격이 있을 때, 십자가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서 삶의 원천이다. 성령이 조명해 주시는 날, 그 날이 바로 오늘이기를 기대한다.
 
의왕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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