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박잠언, 욥기, 전도서는 지혜서이다. 지혜서는 한 마디로 풍요로운 삶, 질서 있고 균형 잡힌 삶, 요즘 식으로 웰빙(well-being)의 삶을 안내하는 책이다. 그런데 지혜서마다 웰빙의 조건이 다르다. 욥기와 전도서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잠언은 하나님과의 관계 못지않게 동료 인간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욥기는 종교적인 열성이 우선이고, 잠언은 세속적인 처세가 우선인 셈이다.

그런데 시대가 흐르면서 잠언의 처세 중심의 가치가 점차 하나님 중심의 가치와 결합하게 된다. 신학자들은 이런 변화의 계기를 바빌론 포로시대로 보고 있다. 포로생활의 냉혹함을 겪으면서 처세 중심의 삶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소용돌이치는 역사는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모진 사람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잠언의 처세 중심의 생각은 점차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잠 3:18). 잠언은 지혜를 “생명나무”라고 말한다. 지혜야말로 장수와 부귀,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하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인간이 탐구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생명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를 예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잠 1:7) 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 부자 이야기가 있다. 그는 욥 못지않게 착하게 살았다. 십계명에 어긋나는 일은 어느 것 한 가지도 어긴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며 예수께 물어온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막 10:21). 과연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큰 부자는 이재(理財)에 밝은 것만으로는 안 된다. 큰 재물은 큰 처세에서 얻어진다. 돈의 흐름과 세상 이치를 잘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권력의 향방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최순실에게 겁박당하면서도 황금 동아줄 잡은 줄 알고 열심히 뒷돈 댄 재벌들처럼 유력 인사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 일은 기본이다. 그리하여 큰 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처세에 매달리게 된다. 예수께 나온 한 부자가 십계명을 빠짐없이 지켰다 하지만, 그가 온전히 하나님을 섬겼다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이 부자는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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