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에 갇힌 하나님

다윗의 공룡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희망 없다. 예수님을 성전예수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 지도자들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가진자와 권력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그것은 이번 최순실 - 박근혜 게이트에서 그대로 보여주었다. 교인들과 국민들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박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데,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여기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기에 바쁜 나머지, 국민들의 피의 절규, 한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해 놓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최소한 한국교회가 예수님께서 활동하신 역사의 현장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안다면, 예수님의 활동하신 역사의 현장에서 벌인 하나님나라운동과 다른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미천하고, 무식하고, 소외된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시고,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 운동을 벌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왕권이 수립되면서, 하나님의 뜻에 반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지배계층은 사무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이웃 나라처럼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부족동맹이었다. 그들은 국가 이전에 사사들에 의해 결속되었고, 이들은 재판을 주관했고, 비상시 전장에 나가 싸웠다. 어찌 보면 원시민족의 추장과 같은 위치에서 카리스마적 존재였다.

부족동맹은 계약했다. 그 계약은 하나님을 숭배하고, 복종하는 것을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 사사는 그것에 의해서 권위를 가졌으며, 그 권위로 통치했다. 사사 중에는 기드온, 아비멜렉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도 있었다.

가나안 주변의 종족들은 국가형태를 만들고, 부족동맹을 위협해 왔다. 특히 불레셋족의 침공이 계속되었다. 이 때 가나안의 지도층들은 전제군주와 일치하는 왕권수립을 강력히 제기하고 나섰다. 사무엘은 전제군주의 왕권수립이 하나님의 주권에 반하는 것으로 보고, 왕권수립을 반대했다. 그리고 왕권수립에 대해 경고했다.

“왕이 너희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알려주겠다. 그는 너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병거대나 기마대의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다. 천인대장이나, 오십인대장을 시키기도 하고, 그의 밭을 갈거나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보병의 무기와 기병의 장비를 만들게 할 것이다.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를 만들게 하고, 요리나 과자를 굽는 일도 시킬 것이다…중략)…너희의 남종과 여종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좋은 소와 나귀를 끌어다가 부려먹고, 양떼에서도 10분의 1세를 거두어 갈 것이며, 너희들마저 종으로 삼으리라. 그때에 너희는 너희들이 스스로 뽑아 세운 왕에게 등을 돌리고 울부짖겠지만 그날에 야훼께서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실 것이다(공동번역성서 사무엘상 8장11-18절)”

이 경고의 내용은 한마디로 왕을 세우려는 것이 다른 신을 섬기려는 동기가 되고, 사병화를 통해 정권을 유지하고, 재산을 착취하고, 백성을 노예화하고, 국가라는 이름 아래 백성들을 비인간화 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통치해야

이 왕국은 한마디로 백성이 원해서 세워진 왕국이 아니었다. 사울이 왕에 오른 이후, 유력한 자들은 그를 추종했다. 그러나 가난한 자, 떠돌이 등은 그의 왕권을 거부했다.(사무엘 상 11장 12절) 그것은 가나안에 정착한 부족들이 이미 왕권적 국가를 수립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폐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을 반대하는 큰 주류가 있었다. 일부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을 때, 기드온은 “내가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니오, 내 자손이 그대들을 다스릴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야훼시오”(판관기 8장 23절)라고 거절했다.

이것은 이 세계를 다스릴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져 하나님의 통치에서 멀어져가는 오늘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무엘은 사울을 첫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는 한 전선의 사령관에 불과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침략해 오는 불레셋군을 물리치는 장수의 역할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중심으로 한 반란자들에 의한 내환과 외침에 시달리다가 아들들의 모반에 의해 2년의 통치로 끝났다. 성서는 사울이 다윗에 대한 질투의 화신처럼 평가되고 있다. 결국 다윗은 제왕국가를 형성했다. 다윗이 세운 국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대한 나라였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메시아사상의 골격을 제공해 주었다.

다윗은 자기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다윗의 추종자는 그의 혈족과 무법자들이었다. 한마디로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던 사람들과 떠돌이 등 피압박 민중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윗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다윗 왕국 역시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를 못했다. 다윗은 통차자의 위치를 굳히고, 야욕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다윗은 그의 세력을 얻기 위해 부유한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과 정략적으로 결혼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이스라엘의 영토를 넓히는데 이용되었다는 것이 사무엘상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남부인 유대지방을 통치했다. 그는 북이스라엘을 통합하는데 게을리 하지를 않았다. 또 사울의 유족들을 없애는 일에도 가담했다. 예루살렘을 강점하고, 그곳에 법궤를 안치하고,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예루살렘은 다윗의 개인소유였기에 그곳을 ‘다윗 성’이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의 성소인 주인인 제사장도 그가 임명했다. 그리고 우리아의 아내가 탐이 나서 우리아를 전선으로 보내 죽게 하고 아내를 받아들였다. 그는 그 일을 두고 참회하는 것으로 잘못을 상쇄하려 했다. 그는 큰 부자였다. 가난한 자의 한 마리 양까지 빼앗는 약탈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가난하고 천박한 백성의 희망을 이용했고, 마침내 민중을 배신했다. 민중의 적이 되었다. 그것은 다윗의 아들 압살놈이 아비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많은 추종자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 그는 적대자들을 숙청하는 일에 잔인했다. 그는 이복형인 나도니아를 살해했고, 제사장 아비아달을 추방했다. 요압을 살해하고, 사울의 신하였던 시무이도 죽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안보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정권유지가 전부였다. 에돔이 떨어져 나가 독립했고, 다메섹 도성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 향락을 즐겼다. 그는 냉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던 유대사가들의 눈을 멀게 하고, 다윗이 계획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완성하고, 하나님을 그곳에 가두어 버렸다. 한마디로 성전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이다. 왕궁은 성전보다도 더 화려했다. 그는 점령한 족속의 여인들을 후궁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이 섬기는 제신도 받아들였다. 솔로몬은 후궁이 700명이며, 몸종이 300이었다.

한국교회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결국 다윗에 의해 세워진 남북조는 자식들의 모반에 의해 갈라졌을 뿐만 아니라, 다 빼앗겨 예루살렘 지방만 남게 된 책임이 그의 좌악에 있었다. 어찌 이렇게도 한국교회와 비슷한가(?) 오늘 한국교회는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떠돌이, 걸인, 농업농민들에 의해 크게 성장했음에도, 하나님을 호화로운 성전에 가두고,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있다. 그러면서 다윗의 공룡문화를 구축하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 국민들의 절규, 한의 소리는 아랑곳 하지를 않고,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다윗성 쌓기에 바쁘다.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한국교회는,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맛을 잃어버린 지 너무 오래 되었다. 가난한자, 노동자, 농업농민, 떠돌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오히려 이들이 다윗문화에 길들여져 공룡화된 한국교회를 비판하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져가는 한국교회는 무게의 중심을 내려놓고, 민족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행동하는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한마디로 국민들 속에 들어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지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버밍헴 감옥에서 한 말은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교회가 매우 강한 힘을 가졌을 때가 있다. 당시 초대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당시 교회는 여론의 광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척도였다. …교인들은 인간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하늘의 백성’이라는 신념으로 밀고 나갔다. 수적으로는 작았지만 맡은바 역할이 컸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위험에도 굴하지 않았다. … (중략) … 하나님은 전례에 없는 벌을 교회에 내릴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초대교회의 희생정신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수백만의 독신자들을 잃게 될 것이다. 21세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비사회적 모임으로 추방당하게 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를 향해 경고하는 말이 아닌가. 그럼에도 킹은 실망하지 않았다. 그것은 킹이 ‘교회 안에 교회, 깊숙한 정신의 교회’를 믿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마비된 체제의 사슬을 풀고, 과감하게 뛰쳐나와 우리와 함께 자유를 위한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고결한 정신을 가진 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킹 목사의 말대로 ‘희생을 건 교회 속에 교회’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을 쳐야 하지 않을까(?) 국민 속에 들어가 하나님나라를 실현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여전히 권력자와 가진자들의 잘못을 비호하는데 그, 중심에 서 있다. 목회자들은 SNS를 통하여 권력을 비호하는 문자를 보내기에 바쁘다. 또 국민들의 뜻을 모아 벌이는 국민대회 맞불집회의 중심에 서 있다. 한마디로 검찰도 잘 못되었다는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 대통령의 범죄사실을 물타기 하는 일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앞장서고 있다는 결론이다.

사실 한국교회는 어떠한 형태가 되었던 가난하고, 소외되고, 미천하고, 농업농민, 노동자, 봉건주의 사회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여성. 떠돌이 등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던 때에 크게 성장했다. 이러한 하나님나라운동은 영미선교사들의 영향도 받았지만, 민족의식과 성서의 가르침을 자각한 기독교지도자들의 영향이 컸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권력의 주변을 맴돌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일부 초기 선교사들은 왕권을 등에 업고, 가난한 조선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으며, 정교분리를 내세워 일본 식민지세력에 협력했다. 이들이 일본국가주의에 굴복하고, 신사참배에 적극 가담하는 등 배교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또 해방 후 권력을 등에 업고, 교회를 크게 성장시켰으며, 국정농단의 중심에 떠오른 최태민 목사의 발아래 엎드려 온갖 혜택을 누렸다. 이는 결국 하나님을 성전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이 권력의 주변에서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목소리와 행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과연 민족과 교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 국민들은 묻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유럽으로 건너가 자기들의 문화에 맞게 뿌리를 내렸듯이. 우리도 우리의 하나님, 한민족의 정서에 맞는 하나님을 고백해야 한다. 한마디로 선교의 대상이 한민족이어야 하며,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그 현장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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