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절 성탄절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태복음 18-25절)

예수님이 탄생한 성탄절은 세계적인 명절이며, 축제의 날이다. 그만큼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번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기독교가 세계인의 종교가 되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평화와 사랑, 그리고 정의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세계 속에 뿌리를 내렸음에도, 세계의 곳곳에서는 전쟁과 갈등, 기아, 살인, 폭력 등이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다. 내 가정과 자기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성탄절이 술과 환락 속에서 자기본능을 발산하는 명절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독교인들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않다.

휘황찬란한 십자가탑의 불빛과 거리의 네온은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의 상징이 되어 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어두운 밤에 동네주민들의 등대가 되었던 교회의 십자가탑의 불빛은 빛을 잃어 버렸다. 오히려 전기로 예수님을 고문하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다. 또한 시멘트 속에 갇혀 슬프게 우는 ‘성전 예수’를 연상케 한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오늘 한국교회는 호화로운 교회당에 예수님을 가두어 버렸다. 그렇다보니 오늘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은 ‘돈’을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권력과 결탁된 나머지 연일 권력자들을 감싸는 괴변만 늘어놓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서는 국민들을 향해 ‘빨갱이’. ‘용공분자’, ‘좌경분자‘ 등으로 매도하는데 바쁘다.

요즘 SNS를 통해 전달되는 목회자들의 글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을 감싸는 글들이며, 심지어 권력자가 북한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를 마치 야당의 관계자들이 보낸 것처럼 퍼 나르는 웃지 못 할 일이 목회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민심을 이반한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것이 들어나자 목회자들은 은근실적 그것을 내리는 웃지 못 할 일이 발생했다. 왜 한국교회는 악령과 오방에 쓰인 권력자를 감싸는 일에 급급 하는 것일까(?) 아기 예수의 탄생은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거부를 뜻하며, 억압과 불의에 대한 항거를 뜻하는데 말이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의미만 분명하게 알았더라면, 한국교회의 일부목회자들이 참담하고 쓰레기 같은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탄절에 담긴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필요가 있다. 2천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이들 속에서 비폭력운동을 벌이셨다. 그리고 봉사와 헌신으로 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직자와 청소부 중에 누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가깝냐(?)고 물으면, 청소부가 하나님나라에 가깝고, 성스럽다고 말한다.

아기 예수,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 평화를 선포
역사 속에서 새로운 미래를 연 예수

 
그렇다. 예수님의 정신은 한마디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다. 아니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인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 오셨다.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과 맞섰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회는 분명 예수님이 세우셨다.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곳이 교회이다. 그래서 역사학자인 은준관 박사는 농촌교회가 가장 모범적인 교회라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그곳으로 가라고 했다. 이 말은 한국교회의 선교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고, 떠돌이, 창녀, 병신 등 처절한 곳에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말로 해석된다.

예수님은 인류의 역사 속에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닫힌 인류사회, 인류의 역사를 열고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을 인류에게 가져다가 주었다. 전쟁과 갈등으로 인해 파괴된 인류에게 평화를 선포하셨다. 닫힌 인류사회가 소통하며, 미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도, 그 중심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를 거부한다. 이스라엘의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나머지 예수님과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돈’을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틀에 박힌 생활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중세교회를 닮아가는 한국교회에게는 예수님의 새로운 미래는 없다. 권력과 결탁해 부자들을 위한 교회로 변한 한국교회에 새로운 미래를 기대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 나가는 것보다 힘들다.

불의와 거짓의 토대 위에서 사는 인간들의 삶속에서 메시아를 발견할 수 없듯이, 불의한 정권을 대변하고, 생명의 가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에는 메시아가 없다. 그래서 박재순 교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맑은 귀와 볼 수 있는 맑은 눈을 가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오방과 악령에 길들여진 권력자는 감싸면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불의와 결탁하고, 불의한자들과 권력자, 가진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에 바쁘다.

억압과 수탈의 체제를 깨고 닫힌 사회, 닫힌 역사를 연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밖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새로운 역사를 연다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성전의 하나님, 성전의 예수님으로 만들어버린 오늘 한국교회가 새로운 역사, 새로운 미래를 담보해 낼 수 있는가(?) 2016년 성탄절에 묻는다.

위 본문에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다. 예수는 ‘구원하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 이름 속에 그리스도의 사명이 담겨져 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것이라고 했다. 백성의 운명과 백성의 죄는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오늘 한국교회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면, 불의와 거짓에 맞서 싸우고,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헌신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불의를 보고서도, 침묵한다는 것이며, 오히려 불의한 정권에 협력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역사를 정리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처음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는 권력과 결탁해서 가난하고 천박한 사람들을 향해 회개를 강요했다. 가난한 백성들이 무슨 죄가 그리도 커서 ‘회개하라’고 했는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일본식민지세력을 정당화 해 주었다. 이는 일본 국가주의에 굴복,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배교행위를 저지르는 결과를 불러 왔다. 그리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국민들을 향해 일본군에 협력할 것과 젊은 대한민국의 딸들을 향해 정신대로 갈 것을 설득하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이후에는 불의한 군사독재정권을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곳, 한민족의 염원인 민족통일을 대해 침묵했다.

국민들이 이것만은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도, 한국교회는 ‘한일군사보호협정’에 대해 침묵하며, 이를 반대하는 국민들을 오히려 ‘빨갱이’로 매도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군화발이 한반도를 다시 짓밟아도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여진다. 한국교회가 근현대사를 똑바로 알았다면, 아니 굴절된 기독교의 역사를 바로 잡았다면, 이 같은 오류는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한국교회는 최태민 목사의 사이비적인 활동에 대해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일까(?) 국민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이미 본지가 지적해 온 것처럼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2016년 성탄의 계절에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며, 2017년 일주일을 앞두고 한국교회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무엇으로 약속하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지 걱정스럽다.

예수의 탄생은 불의한 세력 거부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로마에 의해 평정되고 전쟁이 없는 평화가 이루어졌다. 이 로마의 평화는 창과 칼에 의한 평화, 팍스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얻은 평화이며, 압제와 수탈을 강요하는 평화였다.

하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런 거짓된 평화를 깨고, 진정한 평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한 참 평화에 이르는 길을 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인류 역사의 고통, 가난하고, 처절하며,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사무친 한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의 탄생은 억압과 불의에 대한 항거를 뜻한다. 그래서 그의 탄생은 요란하기는커녕 초라하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에 의해서 박해를 받는다. 분명한 것은 아기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다. 갈릴리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이다가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탄생일 날 세상 사람들은 술과 환락으로 본능을 발산하며, 성탄절을 모독하고 있다.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들뜬 마음으로 성탄절을 보낸다. 여기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욕심을 버리고, 사사로운 원한과 미움을 풀고, 그리스도의 평화와 공의를 실천해야 한다. 생활 속에서 감사와 기쁨을 서로 나누면서 축복해 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새로운 세상, 새로운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 절망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 고통의 현장에,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또 내일의 희망을 잃어버린 노숙자가 있다. 또한 자식을 차가운 바다 속에 그대로 둔 채 광화문 네거리에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세월호 유가족이 있다. 이들의 절규는 오늘도 하늘을 사무친다. 이들을 위로하지 못하는 교회, 한마디로 희망 없다. 오히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을 비난한다. 목회자들은 이들을 비난하는 글들을 SNS를 통해 퍼 나르기에 바쁘다. 이 땅에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한국교회를 향해 어떤 말씀을 하실까(?) 걱정스럽다.

성탄절 아침 한국교회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보잘 것 없지만 누구보다 존귀한 사람들을 향해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온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손을 잡지 않고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할 수 없다. 아기 예수를 맞을 자격도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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