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예수님은 봉사하는 삶, 남을 위한 삶을 사신 분이다. 과연 오늘 그리스도의 삶을 산다고 떠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나 자신에게도 물어 본다. 아픔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아픔을 위로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일들을 성탄절에만 연례행사처럼 하고 있다. 평소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야 한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외면하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자격이 없다. 아침마다 안방에 전해지는 뉴스는 침담하다. 이른 아침 청소부가 청소를 하다가 봉고차에 치어 숨졌다는 뉴스, 불을 끄다가 소방관이 숨졌다는 뉴스, 아픈 남편을 대신해서 청소를 하다가 숨졌다는 청소부 아내의 이야기, 우편배달부의 죽음, 격무에 시달리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어떤 경찰관의 소식 등등은 내 가슴을 두드린다.

이들의 성실하고 치열한 삶의 질은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정치인들이, 공무원들이, 회사 회장들이, 이들처럼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다면, 최순실과 같은 국정농단은 없었을 것이다.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최후의 수단도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좀 더 밝아졌을 것이다.

성탄의 계절에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과 정의를 절실히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고통 속에서 어두운 절망에 싸여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데 있다. 말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교는 행함의 종교이다. 문제는 오늘 그리스도교가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다. 휘황찬란한 네온은 봉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채워주지를 못하고 있다. 불빛 찬란한 십자가탑은 세상 속에서 빛을 잃어 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다. 오히려 아기 예수님을 전기로 고문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마저 든다.

이른 새벽부터 험하고 궂은일을 맡아서 하는 이들은 참으로 봉사적인 삶, 남을 위한 삶을 사는 자들이다. 쥐꼬리만한 봉급이긴 하지만, 가족의 생게를 위해서 이쩔 수 없이 궂은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얕은 생각이다. 이들의 생각이야 어떻든 그들의 삶은 순전히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꾀죄죄한 몰골을 하고 악취나는 더러운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불속에 뛰어드는 소방관, 범죄예방을 위해 밤을 새우는 경찰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우편배달부들은 이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만일 청소부들이 한 달 동안 일을 안 한다고 생각하면, 이 도시는 쓰레기로 가득 찰 것이고, 경찰관과 소방관, 그리고 우편배달부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 사회는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또한 몹쓸 전염병이 창궐 할 것이고, 약자들은 무서워서 거리를 다니지 못 할 것이다. 때문에 국민들은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찌보면 남을 위해 사는 이들은 그리스도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에 가깝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남을 위해 궂은일 하는 이들은, 바벨과 맘몬을 노래하며, 가식적인 삶을 사는 성직자보다도 거룩하다. 이들이 나를 위해 희생적인 일을 해주기 때문에, 이들에게 늘 감사하며, 정당한 보수를 받으며, 당당하게 국민의 한사람, 아니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성탄절 아침에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비우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어두운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 추위와 굶주림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전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권력자와 부유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해야 한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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