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2016년은 역사 속에 묻히고, 2017년 새해가 시작됐다. 한해가 지나갈 때 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모두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가?”를 묻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인간은 두 발로 서서 걸을 때부터 영원한 생명을 논하기 시작했다. 하늘의 별과 달, 그리고 태양을 보며, 낙엽이 지고 새싹이 돋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영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한마디로 인간은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인 태고부터 죽음의 문제를 고민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죽음을 고민하며,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가를 알고 있다. 또 인생이 짧은 것도 알고 있다. 무한한 우주에 비교하면 지구는 티끌보다 작고, 인간은 이 타끌의 먼지만큼이나 작다. 수십억년의 우주 시간에 비하면, 인생은 순간의 찰라다.

현대인들은 생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문명의 요란한 빛깔에 눈이 어두워, 기계문명에 얽매여 그저 눈앞에 주어진 것만을 보고, 그것에만 몰두한다. 일상적인 삶에 묻혀서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에 대한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행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직접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고 반문했다. 율법에 정통한 율법교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이같은 대답을 듣고 칭찬해 주었다. “네 대답이 옳다” 율법교사의 답변은 옳았다. 하지만 율법교사는 율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와 구체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율법교사의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자신의 율법지식을 과시하려고 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으로부터 들으려는 진지하고, 겸손한 자세가 아니었다. 그는 예수님과 토론하려고 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토론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율법교사는 남을 시험하려는 오만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삶의 무게를 나의 중심에서 하나님에게로 옮겨놓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무게의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한번쯤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교회의 무게 중심도 마찬가지이다.

성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계명과 이웃사랑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은 나의 중심을 옮겨놓는 행위이다. 중심이 내게만 있을 때는 사랑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어린아이는 마음을 통해서 주고받는다. 어린아이는 속과 겉이 다르지 않다. 위선도 없다. 위선자는 자기중심으로 사는 자며, 이중적으로 자기를 폐쇄시키려는 자이므로 사랑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인간은 본래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중심을 두고, 이웃과 더불어 살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이 자기중심으로만 살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살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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