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새면 우리들은 다시 떠났다
길은 끝없이 멀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도보로 걷는 일에 지친 날들을
힘겨워 무수히 쓰러지던 길
어느덧 그 먼 길 다 끝나가고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끝이 보인다
노을 묻은 회양목 덤불 넘어 햇살 바른 들길
남은 두어 굽이 돌아가면
바로 내가 당도할 나의 마지막 집 한 채
마른 풀밭에 화강암 깎아 세운 문패가 보인다
그 먼 길 끝에 서 있는 희망
어느덧 함께 가던 사람 먼저 가서
돌문 세우고 울타리 쳐놓고 기다리는 집
길 끝에 내 희망 남아 있으니
마른 살 훈훈히 춥지 않으리

무서리 하얗게 옥양목 휘장치고
삭신 마디마다 뼈 삭는 소리 들리는 밤에도

▲ 정 재 영 장로
떠나는 장면과 당도할 마지막 집의 이중 구조를 볼 수 있다. 헤어짐과 재회가 있는 동시성, 두 곳은 혼자 막연히 가는 곳이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만남은 이별의 원인임을 노래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반대로 이별이 가져오는 만남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즉 이생의 죽음 후 당도할 내세의 확신을 고백하려 함이다. 헤어짐의 슬픔이 아닌 만남의 기쁨이다.

이곳은 화자의 문패가 있는 집, 즉 본향의 집에서 종말론적 인식 곧 종교적 의식을 알게 해준다. 내세의 종착지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적멸이나 소멸인 염세적 허무주의가 아닌, 재회 인식론에서 기독교적인 내세관을 알게 해준다.

시의 부제가 ‘놀이’다. 왜 이 말을 사용했을까. 시인은 삶의 ‘지친 날’이 고난이 아닌 축제라는 것이다. 마지막 자기 집을 향해 가는 ‘놀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 부제가 떠남과 만남의 동시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떠남도 놀이고 만남도 역시 놀이의 결과인 것이다.

떠남과 만남의 융합 지점은 자기 집이다. 둘 다 희망의 축제(놀이)인 곳이다. 이런 인식은 현세의 고난을 내세의 희망으로 치환시켜 버리는 신앙관이 극명하게 노출된다. 이질적이고 상극적인 이별과 만남이 동시적으로 놀이성격이라는 융합인식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역행성(퇴행성)이 아닌 전향성의 새로운 가치를 암시하며, 내세지향적인 면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구도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종교적 메시지를 천상적 이미지를 열거하지 않고 지상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엘리엇이 말한 ‘정서(관념)으로부터 도피’라는 이론에 합당한 작품인 것을 스스로 변증해 주고 있다.

한국기독교시인협회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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