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이다.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흔히 한국교회는 교회다운 교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렸고, 그리스도인이 섬기는 자유와 사랑하는 자유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다윗문화에 길들여진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성전에 가두는 ‘성전예수’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 하나님을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특히 한국교회는 호화롭고, 맘몬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경쟁을 벌이며,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자유, 섬기는 자유를 말하지 않는 대신, 축복과 회개만을 강조,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상실케 했다. 또한 권력과 결탁해 교회성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과는 거리가 먼 선교활동을 벌여, 많은 시행착오를 일으켰다. 오히려 복음은 세상을 향해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하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교회이다. 또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목회자들은 모두 알면서도, 교회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지를 못하고 있다. 오히려 예수님과 높은 담을 쌓는 것은 아닌지(?) 생각마저 든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가 그렇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갈라디아서 5장 1절)

철학자 헤겔은 한 사람만 자유롭고, 다른 모든 사람이 예속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되어가는 사회로 발전하는 것이 역사라고 했다.(헤결의 <역사와 철학> 참조) 한마디로 성서는 자유에 관한 책이다. 아니 섬기는 자유와 사랑하는 자유를 분명하게 담고 있는 진리의 책이다

구약성서는 자유를 찾아 헤매는 유랑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토인비의 <역사와 연구>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갈대아 문명사회가 정착되어서 자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자유가 없는 거대한 국가 체제로부터 탈출했다는 내용도 있다.

성서 출애굽기도 고대 이집트 왕국에서 신음하던 노예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이야기이다. 억압과 수탈 때문에 고통당하던 노예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가난한 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이집트에서 탈출해 가난안에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이들의 왕국도 억압적이고, 수탈적인 체제로 변했다. 이 때 예언자들이 나와서 왕과 귀족들의 억압과 수탈을 비판했다. 또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가두어 버렸다. 하나님을 배신한 것이다.

결국 이 나라는 군사적이고, 폭력적인 앗시리아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나라를 잃고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었다가 50년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그 기쁨의 이야기는 제2이사야서(이사야 40-55장)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 기쁨도 잠깐, 곧 마케도니아, 시리아, 로마제국의 억압적인 지배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 1천여년 동안 자유의 나라를 위해 모부림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인간들의 통치를 기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했다. 하나님만이 참된 자유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서 신음하던 조선의 백성에게 있어 성서의 말씀은 희망이었다. 헌데 일본제국주의는 정교분리를 내세워 조선백성의 정치 참여를 절저하게 막았다. 구약성서를 읽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 철저히 막았다. 선교사들 역시 구약성서를 텍스트로 설교하는 것을 주저했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참담한 설교는 영미 지배자의 신학과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기독교 역시 일본국가주의에 쉽게 굴복하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교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섬기는 자유와 사랑하는 자유

오늘 지구촌 곳곳은 인간의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정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들은 보다 낳은 삶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지중해를 건너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풍랑 등으로 인한 사고로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하고 바다 속에 수장되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간의 갈등, 가공할 무기, 자연재해 등으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도전한 결과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오래 동안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난한 자, 억눌린 자, 갇힌 자들을 해방하는 복음으로 선포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 먼 사람들에게는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선포하는 것이었다” (누가복음 4장 18절)

주님의 은총의 해(희년)는 5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온다. 그 해에는 빚 때문에 빼앗긴 땅은 다시 찾고, 종이 되었던 사람들은 종의 신분에서 해방된다.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햬방 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오늘 한국교회가 50주년, 100주년, 150주년(희년)을 기념하며, 축제의 날로 기뻐하는 행사를 갖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금년도 종교개혁 500주년은 10번째 맞는 희년이다.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예수님의 섬김의 자유와 사랑하는 자유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행사가 기념적인 행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목소리이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가두어 둔 하나님을 해방시키고, 성전 예수님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예수님이 되도록 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섬기는 자유이며, 사랑하는 자유이다. 또 교회의 정체성과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교회이며, 그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섬기는 자유와 사랑하는 자유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

바울은 권위주의적이고 문자주의적인 율법사고를 깨트렸다. 영적자유와 복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싸웠다. 울법주의자들에게 맞서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니 마음을 굳게 먹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바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교회는 그리스도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자유에로 해방시켰는지에 대해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굶주림, 억압, 공포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려야 한다. 과로에 시달리는 노동자가 과도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실업자가 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성서는 노동하지 않고, 가난한 이웃의 재물을 빼앗아 먹고사는 사람들을 책망했다.

또한 조직화 된 사회에서 일 할 수 있는 자유와 일 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있다. 이 자유와 권리는 그리스도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느 의미를 갖는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만인의 종이다”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어렇게 표현했다.

그리스도인의 만인으로부터 자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자유롭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공허한 자유, 홀로 있는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유이며, 섬기는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자신의 죄와 욕심에 사로잡혀 죄의 종노릇을 하고 있었다. 내 멋대로 내 뜻대로 사는 생활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한마디로 하나님 중심, 이웃중심의 삶을 전혀 살지를 못했다. 무게의 중심이 위로 올라가 언제 침몰 할 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이러한 삶은 겉으로는 자유로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결국 나와 이웃을 죄와 죽음에로 이끄는 삶이다. 사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해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께 도전한 결과에서 빚어진 것이다. 또 전쟁과 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섬기는 사랑과 자유로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결과이다. 오늘 세계 곳곳에 세우진 원자력 발전소, 사람을 한 번에 수 만명을 살상할 수 있는 원자폭탄, 기아에 노출된 세상, 종교간의 분쟁 등은 생명의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 죄이며, 욕심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 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했다. 하나님 자녀의 삶은 홀로 살지 않고,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또 이웃과 함께 사는 삶이다. 그런데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삶을 찾을 볼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모습을 찾아 볼 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리스도의 자유는 섬기는 사랑 속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요한1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인간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 속에서만 자기를 실현 할 수 있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공허한 자유이며, 거짓된 자유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을 때,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사랑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 때문에 인간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이다.

박재순 박사는 자신의 저서 <밥상공동체와 예수운동>에서 “고아가 불쌍한 것은 집이 없고 옷이 없고 먹을 것이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 할 줄 모르고, 사랑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불쌍하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사랑을 경험하게 하고 사랑 할 수 있게 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움직이는 교회

그는 또 “그리스도는 사랑할 수 있는 자유와 종노릇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해 먼저 우리를 우리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사랑은 자신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할 때 자유롭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것은 겸손한 마음이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이다”고 강조했다.

성서에 나오는 인물 면면을 보면, 자신을 대단한 인물로 여긴 사람은 없다. 적어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보두 보잘 것 없고 부족한 사람이라고 고백했다. 이런 사람만이 자신에게서 행방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성서가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 중에 하나이다.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닫혀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어나지 않으면, 자신의 자아를 발견할 수 없다. 진정한 이웃과 진정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리스도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무너트릴 때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이웃을 만날 수 있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와 복음의 자유를 주기 위해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했다 원래 율법은 선하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과 결합되면,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강한 힘을 갖게 된다. 불의한 사회와 결합하면 불의한 사회를 뒷받침 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두부류 사이의 담을 헐고 화해시켜서 하나되게하는 기쁜소식이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자신과 율법주의적인 사고에서 해방시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도록 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인간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웃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외침에 귀를 막는 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없는 사람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고통당하는 이웃들의 소리없는 외침에 동참해야 한다. 노숙자를 비롯한 공사장 인부의 신음소리, 철거민들의 외침, 농부들의 아픈소리, 외국인 노동자의 하소연에 귀를 열자.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향해 행동하는 교회가 되자. 이것이 종교개혁 500주년 맞는 새해 한국교회가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첫 번째 과제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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