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장 27절)는 성경구절이 눈에 확 들어 왔다. 이 성경구절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이 말을 법은 사람을 위해 있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다는 말로 바꾸어 보았다. 법은 실제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한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오히려 그것을 방해 할 때는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인 것이다.

예수님은 법을 파괴하기 위해 파괴하는 일도 없었고, 단지 법이 사람의 권리, 특히 약자나, 가난한 자의 권리를 억누르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 섬기는 자유를 가로막을 때 사정없이 파괴했다.

예수님의 말대로 법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 법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다. 사람이 법에 예속될 수 없다. 그리므로 ‘악법도 법’이라는 괴변의 자리는 없다. 법은 선을 위해, 아니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장치일 때 그 가치가 있고,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법주의자들에게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사람을 살리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마가복음 3장 4절)고 물었다. 이것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법의 의의를 묻는 것이다. 법을 위해 법을 내세우는 것은 법주의자를 규탄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행위나 그것이 법조문에 저촉 되느냐만을 묻는 것은 법주의자의 입장에서라면, 에수님과 정면충돌 할 수밖에 없다.

법주의자는 어디까지나 외향적이고 형식주의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런 법의 자세는 법의 정신을 망각할 뿐 아니라, 법을 교묘히 이용할 수 있다. 또 왜곡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법주의자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법 집행이 형식논리에 지배될 때 법은 자체의 정신을 침해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권을 침해하는 구실만 한다.

인권을 유린하는 법은 그 동기야 어떻든 용인할 수 없다. 바리새파는 법을 국민운동의 도구로 전용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법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것은 법의 형평주의의 장점과 동시에 약점을 드러낸 것이다. 법의 형평주의는 법의 질서를 위한 도구가 되는 경우이며, 질서는 거의 예외 없이 지배자의 통치의지를 관철하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럴 경우 하나의 기계와 같은 구조가 되어 합법적으로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바리새파도 본래 지배도구로서 법질서를 형성한 것이 아니다. 민족 전체의 정신운동을 위해서 법질서를 원용했다. 결과적으로 그 법은 구조적 기준이 되어 민족의 성원을 갈라놓았다. 즉 법을 지키는 자는 ‘의인’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죄인’으로 규정했다.

이 경우 지키는 자와 못 지키는 자의 분계선은 종교나, 유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 중에는 범법자도 있겠으나 압도적인 다수는 그 법질서에 순응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범법자가 된 것이다. 그것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 법은 모세의 법, 즉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이들은 종교사회인 이스라엘공동체에서 소외된다.

예수님은 이런 현장에서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며, 인간의 권리를 옹호하고,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다. 예수님은 이로 인해 범법자, 범법의 방조자, 선동자라는 규탄을 받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고 선언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법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다. 삶은 더불음의 존재성으로서 성서는 ‘하나님 앞에 이웃과 더불어’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과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 삶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이러한 삶이 병들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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