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 태 영 목사

16세기 일본의 작은 섬에 포르투갈인이 표류했다. 이들이 긴 총으로 멀리 떨어진 과녁을 맞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은 총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그들의 말을 배웠다. 17세기 조선의 제주도에 네덜란드인 서른여섯명이 표류해왔다. 하멜 일행이다. 이들 중에도 총포 기술자가 있었다. 조선은 이들에게 노역을 시켰다. 생김새가 특이하다고 춤과 노래를 가르쳐 남자 기생으로 부리기도 했다.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는 조총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했고, 조선은 굴욕적인 역사를 맞았다.(박래용 칼럼, 2017. 01. 02., 경향)

믿음으로 산 선조들의 특징이 있다. 내일을 멀리서 바라보며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목표는 눈앞의 부귀영화가 아니다. 마치 본향을 찾아가는 그네와 다를 바 없이 살았다(히 11:13). 그러면서도 그들은 강하고 담대하게 살았다. 오늘날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세상 염려가 떠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내일을 너무 짧은 단위로 보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익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세속은 언제나 환상과 이미지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유혹들은 실제보다 과장되어 있다. 때로는 불안도 과장되어서 지레 겁을 먹게 한다. 그리하여 세속의 요구들은 사람들을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염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야곱은 모든 믿는 이들의 영원한 귀감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희망이었고, 하나님이 미래였다. 말할 것도 없이 내일을 멀리 내다보며 살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의지만으로는 그리 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늘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세속이계산하는 시간과 달라야 한다. 세속은 미래를 초단위, 분단위, 시간단위로 분절한다. 길어도 1년, 2년, 혹은 5년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의 사람들은 100년 혹은 천년을 단위로 내일을 생각했다. 예언자들이 그 시대와 충돌했던 것은 바로 내일을 바라보는 시간의 차이가 달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내일을 멀리서 바라볼 때 어둠 가운데도 빛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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