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어린 자녀가 사고로 상처를 입고 죽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모른 채 하는 부모는 없다. 그런데 오늘 부모들 중 아이를 죽음으로 내 모는 경우가 하루가 멀다고, 우리가 발을 붙이고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다는데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속에 생명이 있다면, 다른 생명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 옥시사건, 부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아이들, 보다 낳은 삶을 찾아 지중해를 건너다가 배의 전복으로 죽임을 당하는 난민들 등등을 보면서, 국민들과 세계인들이 공분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 내 속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입고 사경을 헤매는 사람을 측은히 여겼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을 측은히 여기는 본성이 있다”고 했다. 누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거나, 어린아이가 차에 치이려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구해 주지 않겠는가(?) 이런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내 안에 생명이 없는 사람이다.

죽어가는 인간을 보고 측은히 여긴 사마리아인은 산 마음, 산 영혼을 지닌 살아있는 사람이다. 측은함을 못 느낀, 느낀다고 하더라도 측은한 아음을 쉽사리 억누를 수 있었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몸은 살았으나, 죽은 인간이다. 이들에게는 하나님과 잇닿은 영원한 생명이 없다. 어쩌면 이들은 여러 가지 변명할 수 있다.

여기에서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은 자기 본위의 삶에서 조금도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들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다. 모든 중심을 자신에게 두었다. 고난당하는 이웃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분명한 것은,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이다. 나 혼자 살려고 하기 때문에 세상은 삭막해지고, 차가와지는 것이다.

모든 범죄와 인간소외는 나 혼자만 잘 먹고, 살려고 하는데서 나왔다. 모든 전쟁과 살상은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살려고 하는데서 일어났다. 또한 이 세상은 나와 너만이 세상도 아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살상은 ‘평화’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이 평화는 예수님이 말하는 ‘평화’(샬롬)가 아니다. ‘팍스’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나’와 ‘너’를 위해 제3자인 ‘그’를 희생시키며 사는 돌덩어리와 같은 사회가 되었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길은 나와 너와 그를 죽음에로 이끄는 길이다. 나만 살려고 나를 중심으로 살 때, 이 세상은 죽음이 지배하는 삭막한 세상이 된다.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의 중심을 이웃과 함께 나눌 때, 이 세상은 생명에의 길로 이끌리며, 생명이 지배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삶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는 남을 위한 존재가 됨으로써 친히 생명이 되고,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삶을 열고, 가정을 개방해서 상처받은 이웃들을 맞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입이 달도록 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한다. 한마디로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강도만난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말로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자에게서 영원한 생명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한다. 내 자신의 문제와 내 가정에 집착하면 참 생명인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이제라도 나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이웃과 함께 나누자.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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