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연합, 다양성 속에 일치

2017년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새해 벽두부터 한국교회는 분열과 갈등의 조짐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겉으로만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교단장들의 친목단체인 교단장협의회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국교회총연합회(이하 한교총)를 출범시켰다. 스스로 한국교회 대표언론이라고 자처하는 국민일보는 ‘130년 한국개신교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극찬했다.

또 한기총 대표회장이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인 이영훈 목사는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7개 교단 주도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이하 한교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교회협)를 아우르는 한교총 출범에 산파역할을 했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한교총내 보수를 대변하는 한기총, 진보를 지향하는 교회협, 두 법인을 사용하고, 한교연은 선교단체를 아우르는 법인으로 사용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아니다. 교회협과 한교연은 이 목사의 말에 대구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7개 교단 주도의 한교총 출범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영미의 식민지신학과 이데올로기적인 신학, 그리고 지배자의 신학과 정통주의 신학을 고수하는 한국교회가 KNCC를 수용하고, 함께하겠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든 상황에서, 희망사항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국민일보가 보도한 한국선교 130년 만에 한국교회가 하나 되었다고 한 것은 한국개신교의 역사를 잘못 이해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한국개신교는 선교초기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선교사공의회’라는 이름으로 교단간의 협력을 통해 단일 공과와 찬송가, 그리고 성경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일본제국주의가 망해갈 무렵 일제의 압력으로 ‘조선기독교연맹’이란 이름으로 하나 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해방이후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며, 반목의 연속이었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당연한 결과였다. 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한국에 이식시켜 놓은 한국개신교는 분열할 수밖에 없었으며, 장로교는 신사참배를 둘러싼 분열을 시작으로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보수주의 신학의 충돌, WCC 가입을 둘러싼 논쟁 등으로 분열을 거듭했다.

또한 교권주의자들에 의한 교단분열은 계속되었으며, 장로교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면서, 현재 300여개의 교단이 실존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분열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주류를 자처한 장로교단에 의해 주일학교 공과가 분열되었고, 찬송가가 주류교단인 장로교단이 독단적으로 편찬했다. 해방 후에도 찬송가가 분열되었고, 성경도 분열되었다. 여기에는 철저한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특히 한국개신교는 일본 식민지세력에 협력하며, 온갖 혜택을 누렸다. 교회지도자들은 대한민국 청년들을 향해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권유하고 다녔으며, 젊은 처녀들을 향해 정신대로 나갈 것을 연설하고 다녔다.

이같은 불의한 세력과 결탁한 범행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불의한 세력을 위해 기도했고, 이들과 결탁해서 교회를 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는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군사독재정권과 부패한 정권을 위해 기도하는 하이에나와 같은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6.25 한국전쟁 당시, 일부 교회지도자들은 김일성을 위한 기도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이 해방 후 반통일적이며, 반민족적인 모습을 철저하게 보여주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개신교의 잘못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돈’을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웃 교단과 단체의 역사와 특수성을 인정하는 풍토 중요
잘못된 권력과 단절하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서 하나님나라 실현해야

한교총 출범 무엇을 의미하나

<1면에서 계속>영미의 교파주의를 그대로 이식시켜 놓은 한국개신교의 분열은 당연한 것이었다. 여기에다 한국개신교는 제국주의적이며, 식민지지배이데올로기적인 영미정통신학에서 크게 벗어나지를 못하고, 이것이 최고인양 고집하는데 열을 올렸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에도, 지금도 이 신학을 고집하며, 주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정죄 받고, 이들의 무소불위한 힘은 하늘을 찔렀다. 이것은 오늘 한국개신교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한국개신교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 질서 없는 종교가 되어 버렸다. 여기에다 한국개신교는 영미의 지배자의 신학, 식민지신학, 정통주의신학을 해외에 선교라는 이름으로 피선교지에 이식시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것도 피선교국의 문화와 역사를 몰각한 채, 교파주의를 이식시키는데 경쟁을 벌여 왔다.

한마디로 한국개신교의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이웃교단과 이웃교회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개신교회의 상황에서 분열은 당연하다. 또한 한국개신교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외면하고, 영미의 문화가 최고인양 선전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영미제국주의 신학과 식민지신학, 그리고 지배이데올로기적인 신학과 신앙은 선교초기부터 권력과 결탁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일부 선교사를 제외하고 대다수의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해 많은 부를 축적했으며, 일본식민지세력과 결탁, 자국의 이익을 철저하게 챙겼다. 국책사업에도 손을 대었다. 그 결과 한국인 대상의 선교활동은, 자연스럽게 예언자적인 정신과 예수님의 정신을 실종케 했다. “권력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며, 정교분리‘를 내세워 일본식민지세력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막았다. 대신 ‘천당’. ‘구원’, ‘회개’ 등의 싸구려 복음만을 외쳤다.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정책은 오늘 한국교회가 정치적인 불의 앞에 굴복하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으며, 권력의 주변을 맴돌게 했다. 그리고 온갖 혜택을 누리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이것은 오늘 기독교의 정치세력화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해방이후 한국개신교가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에 침묵하는 결과를 가져다는 예언자정신을 상실케 했다.

선교사들이 정교분리정책을 조선백성의 뜻과는 무관하게 철저히 이용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마디로 조선백성의 자유와 주체성을 박탈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또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순수복음 제창은 일본 식민지세력의 불의를 은폐시키는 구실이 되었다. 이는 결국 한국개신교의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으며, 불의한 권력과 불의한 정권과 결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일본 국가주의에 굴복,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등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는 결국 해방 후 한국개신교의 분열로 이어졌으며, 한국개신교가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과 단절시켰다.

분명한 것은 “모든 권력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말을 내세워 한국개신교가 분의한 정권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바울의 이 말은 분명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한국개신교가 교단 안에서의 분열도 모자라 연합단체의 분열로 이어져, 도를 넘고 있다. 이념논쟁에 앞장서고 있는 물론, 이념적 분열을 비롯한 세대간의 분열, 노사간의 분열 등 사회적 분열에 앞장서고 있다. 최근 교단장협의회에 속한 7개 교단 중심으로 태동된 한국교회총연합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7개 교단이 ‘갑’질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제 한국교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연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개신교단협의회,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1,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2, 보수교단협의회,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연합회, 세계기독교한인총연합회,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 등의 실체가 존재하고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라

그럼에도 교단장협의회는 “한국교회가 하나 되었다”고 선언했다. 한마디로 설득력이 없는 우스운 일이다. 한교총은 친목단체를 넘어 지금까지 한국교회 안에서 갑의 역할을 해온 대형 7개교단의 횡포이라는데 이의가 없다. 한국교회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논의와 과정 없이 출범한 한교총은 또 하나의 한국교회 분열이며, 한국 대형 7개교단의 정치집단화를 알리는 신호임에 틀림없다.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은 교단과 교단 간의 1대1의 관계가 깨지면서, 연합운동의 본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대형교단과 대형교회의 ‘갑’질은 한국개신교의 소망을 잃게 했다. 그것은 교회협을 보면 알 수 있다. 교회협은 돈 많은 교단과 교회가 들어오면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고 있으며, 순번에 따라 선출하던 단체장의 질서도 무너졌다. 회원교단들의 분담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지만, 분명한 것은 연합운동과 일치운동에 차질이 생긴 것 만큼은 분명하다.

대형교단과 대형교회의 횡포가 한국개신교안에서 계속되는 한 한국교회의 연합은 없다. 무조건 따라오라는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형태가 계속되면서, 연합단체의 장과 교단장은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바리새적인 모습을 한국개신교가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교총의 출범은 대형교단 가진 자들의 축제이며, 향연이다. 중소작은교단들이 한교총의 출범에 대해서 우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웃교단과 이웃교회의 신학과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 지금의 형태로는 한국교회를 하나 될 수 없다.

특히 WCC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합동측이, 아니 WCC 가입 때문에 통합측과 분열된 합동측이, WCC에 가입한 감리교를 비롯한 통합측과 한 배를 탈 수 있느냐는 것은 계속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면서 이웃교회와 이웃교단, 그리고 단체에 대해서 이단으로 규정하며, ‘갑’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교단이 교단 내부의 결의 없이 한교총을 출범시켜 한국개신교의 ‘분열의 역사’를 다시 썼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 할 것인지(?)

성서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을 향해 사랑하는 자유, 섬기는 자유를 가지라고 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정신이며, 성서를 압축한 교훈이다.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교단과 교회가 크다는 이유로 작은교단과 교회을 대상으로 ‘갑’질하면서, 하나의 한국교회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다양성 속에서 일치와 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한국교회를 하나로 만들겠다는데 누가 반대 하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중소작은교단에 상처를 주면서 그들만의 명예를 위해 출범시켰다는 것이며, 왜 대형교단의 교단장들이 정치집단화를 획책했느냐는 것이다. 겉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하나의 한국교회를 명분으로 내 세웠지만, 그것은 설득력은 약하다. 종교개혁을 단행한 루터나, 칼뱅은 종교개혁 단행 후, 자신도 주류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만들고, 화형시켰다는 사실 앞에 무엇이라고 설명 할 것인가. 특히 칼뱅은 장로교를 귀족종교로 만들지 않았는가(?)

한교총의 출범은 최태민-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불러온 탄핵정국과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집단화 했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과 결탁하면서 교회를 성장시킨 한국교회,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한국교회, 예수님을 성전에 가두고, 호화로운 교회당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한국개신교 주류교단들이 친목단체를 넘어 정치집단화 한 것에 무엇이라고 설명할 것인가(?) 여기에 대해 한국개신교 7개 교단장들은 분명하게 답해야 한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라

민심을 읽지 못하고, 천박한 목소리를 토해내는 교단지도자들에게 무슨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한국교회의 주류로 자처하며, 제4연합단체를 구성, 정치집단화를 위한 신호를 보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의 현장에서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을 외면하는 처사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사실 한국개신교단의 지도자들은 세월호 참사로 수백명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막말을 쏟아 내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의 한 인사는 “배 한척이 침몰한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면서, “호화로운 여객선을 타고 여행을 가다가 사고 난 것에 대해 어떻게 국가가 책임을 지느냐”고 막말을 했는가 하면, 또 한 인사는 천안함과 비교를 하기도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A교단의 총회장은 “세월호 7시간을 밝혀내면 죽은 아이들이 살아 나냐”고 신년하례회에서 막말을 쏟아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들이 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다. 이들에게 무슨 희망을 걸겠는가. 한국개신교 지도자들 모두가 이들의 생각이 같다면, 분명 한국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잃어버린 처사이다. 예수님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가시덤불과 벼랑 끝을 헤매셨는데, 예수님을 따른다는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의 입에서 이러한 막말을 쏟아내도 되는 것인지, 또 용서 받을 수 있겠는가(?)를 되묻고 싶다.

그러면서 “기회는 이때다”면서, 정치집단화를 획책하는 한국개신교 최고지도자들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정신이 있는 것인가(?) 교인들은 묻고 있다. 우스운 것은 한교총 출범예배 격려사 순서를 맡은 통합측의 채영남 목사와 최성규 목사가 정동교회 설립자를 언더우드로 말한 사실이다. 이처럼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의 기독교 역사의식 몰이해에 대해 참석자 모두는 경악했다. 이들이 바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다. 그것도 각 교단을 대표한다는 어른(?)들이 아닌가. 이들에게서 교인들은 무엇을 배우겠는가(?) 이들을 믿고 한국교회가 하나 될 수 있겠는가(?) 지도자라면 이 같은 기본적인 역사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들을 보면서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들에 의해서 한국교회가 분열되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이 왜곡되고 있다.

한국교회 농단한 잘못 회개하라

이제라도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야 한다. 한국교회를 농단한 잘못,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잘못, 담임목사직을 자식에게 물려준 잘못, 여성교인들을 성령이란 이름아래 폭행한 잘못, 무게의 중심을 자신에 두고 있는 잘못,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지 못한 잘못, 분열과 갈등을 일삼은 잘못,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잃어버린 잘못, 예수님을 호화로운 교회당에 가둔 잘못, 권력과 결탁한 잘못, 역사를 몰이해한 잘못,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터부시한 잘못,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잘못, 죽임을 당하는 자들을 그냥 지나쳐버린 잘못 등에 대해 처절하게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역사의 현장에 동참해야 한다. ‘한교총의 출범은 하나의 한국교회를 향한 행진이 아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또 하나의 분열이며, 역사는 준엄하게 심판 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하나의 한국교회를 표방하며 출발한 한교총은, 지금까지 대형교회들이 그래왔듯이, 작은교단을 상대로 ‘갑’질을 하겠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음을 분명하게 시인하고,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으로는 하나의 한국교회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진정으로 한국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이러한 잘못과 단절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평화와 사랑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해야 한다. 그리고 이웃교회와 이웃교단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또 자신에게 쏠려 있는 무게의 중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갑’질을 하겠다는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의 한국교회를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자유와 섬기는 자유를 가질 때 가능하다. 또한 호화로운 교회당에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지 말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한다. 교회는 행동해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럴 때 한국개신교가 분열과 갈등에서 벗어나 하나가 될 수 있다.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나라운동에 동참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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