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 성 택 목사

최근 특검에 불려나가던 도중에 추재 기자들을 향해 외쳤던 최순실의 '민주'발언에 온 국민이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이를 지켜보던 특검 청소용역 아주머니의 "염병하네"가 다수 국민들로부터 사이다라는 칭찬을 듣고 있다. 이를 들은 모 정치인은 대통령이 그러면 '지랄하네'라고 했을거라고 가세했다. 하기는 욕하는 사람이나 맞장구치는 사람의 심정도 이해하지만 필자의 심정은 씁쓸하다.

사회적 용어로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있다. 내가 할수 없는 일과 말을 누가 대신해 주었을 때의 대리배설 쾌감을 말한다. 욕도 대표적인 카타르시스의 수단이기에 아마도 몇 국민들은 이들의 이같은 욕설과 일갈에 통쾌한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지는 지금 무척 슬프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이 욕을 섞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된다고 할정도로 청소년들의 언어 정서는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과거 민주당 후보들의 막말 파문으로 사퇴하고 지난 총선에서는 거친 입담의 후보들이 연이어 낙천하는 일들이 발생했지만 지금도 정치인들의 막말은 하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고 심지어 그것이 그들의 인기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이 무례한 욕설이 위선 가득한 기성 기득권에 대항하고 조롱하는 수단을 이해되고, 순수 소박한 서민 이미지를 대변하는 언어로 부각되고 있는데서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욕설이 그 자체로 천박하나 웃음과 해학의 전달 수단으로 대화의 감초처럼 던져지는 욕지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할머니가 손주보고 '이런 망할 놈'이라고 말해도 그것은 애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증오와 미움의 적대적인 감정으로 퍼부은 욕은 모욕이요 인격살상이다.

욕은 근본적인 천박성을 벗어날 수 없다 . 아무리 카타르시스 효과룰 내세우고 답답한 이의 속을 뻥 뚫어 준다고 하여도 그것은 여전히 비인격적 비속한 말일 뿐이다. 절대로 욕설이 민주사회의 정당한 의사표현 수단이 될수 없다. 건강한 사회에서 문제와 고통은 절차와 법을 따라 해소해야함이 원칙이며 그 과정에서의 답답함은 공동체가 감당해야할 몫이다. 그것을 뛰어 넘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함이 폭력이요 비민주적인 폭거이다. 지금 대선을 앞둔 마당에 소위 이런 막말 마케팅으로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인사들은 이를 명심해야 한다.

욕에는 원색적 육두문자가 있다. 또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안하무인 언사가 있고, 상황파악 못하고 내뱉는 무책임하면서도 소신으로 포장된 궤변도 있다. 그런데 차라리 육두문자는 애교로 보아줄 수 있다. 그러나 인기나 인지도를 위해 자신의 말로 상대가 어떻게 되든 일단 내뱉고 문질러 버리는 안하무인적 언사에 분노한다. 나아가 국운과 민족의 미래가 걸린 즁대한 사안을 마치 옆집 일 간섭하듯 튝툭 내던지는 무책임한 소신 발언은 정말 보아주기가 역겹다.

언어는 그 사회의 성숙도요 가치와 질서의 상징이다. 이런 사회에서 욕은 긍정적인 일에 효과적인 해학적 임펙트면 충분하다. 그러나 욕쟁이가 주류로 뜨고 그것으로 인기몰아가 된다면 그 사회는 미성숙한 사회요 병든 사회이다. 시민의식의 측정은 언어생활로 가능하며, 문화도 예술도 그리고 정치도 언어를 주요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언어에 포집된 사회적 가치란 무궁하고 무진하며 값비싸고 중요한 것이다

트럼프의 대통령의 언행에 그의 불행한 미래를 예고하는 이들이 많다. 투테르트가 난해한 필리핀 국정의 안정을 위해 취한 조치가 일부로 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지만 차분히 그의 막말을 지켜본 세계인의 마음은 착찹하다. 이런 험한 인사들이 뜨는 것이 어쩌면 기득권 층의 자업자득인지 모른다. 얼마나 소외계충들의 분노가 컸으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겠는가?

우리 기성 정치인들과 기득권층의 깊은 반성해야할 슬픈 세계적 현상이다.

그리스도대학 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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