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종 택 목사

앞서 살펴 본 대로 우리사회는 버려진 인간을 통해 구원받고 완성 된다. 버림받은 자들의 고통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과 개인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교회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사랑에 근거한 공동체이다. 이러한 교회는 사랑하는 자유와 섬기는 자유를 사진 공동체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는 사랑하는 자유와 섬기는 사유를 상실한 나머지 잃은 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잃은 자를 찾았을 때,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뻐한다.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 한국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가슴 아프다. 루터의 종교개혁 95조항을 보면, 많은 조항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돈’을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한국교회는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에 이르렀다. ‘돈’을 주고 성직도 사고, ‘돈’을 주고 단체장도 산다. 이렇다 보니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아닌가. 교회들은 자기들 안에 안주하고 있다. 다쳐진 교회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헌신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음을 앞두고서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한 이들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공동체는 특권을 누리고, 주도권 잡아 볼 속셈으로 교회에 오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 의해서 교회는 분란에 휩싸이고, 사회법정서에서 끝없는 다툼을 벌인다. 오늘 변호사들이 한국교회 때문에 밥을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에 이르렀다.
교회는 자기 욕심과 주장을 누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곳이다. 교회는 우리의 생각과 뜻을 드리고, 몸까지 바치는 곳이다. 우리의 삶 전체를 바치는 곳이다. 그리고 뜻과 정성으,을 모아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다툼이 벌어지고, 개인 이기주의가 만연되어 있다. 공동체성은 그 어디에도 배어있지를 않다.

사도바울은 “유대사람이든 헬라사람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한 성령으로 … 한몸이 되어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 말 한 것처럼, 초대교회는 이런 원칙을 지켰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살았다. 로마제국 시대의 교회는 가난하고, 힘없고, 처참한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기관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노릇을 했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간난한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교회 수입의 4/1을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쓰도록 규정했다. 귀족들의 저항에도 고리대금 행위를 금지하는 교회법을 제정했다. 고대와 중세에는 고리대금 행위가 가장 중요한 수탈방식의 하나였다. 이것은 중세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다 교회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게르만 국가들도 교회법을 모토로 시민법을 제정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로마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가난하고 소외되고 떠돌이에 대한 실천적인 봉사와 노력이 교회의 선교에서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권력과 결탁, 부자교회가 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등지게 되었다.

한국교회 역시 선교초기에는 가난하고 천박한 조선의 백성들을 향해 사랑과 긍휼을 베풀었다. 교육을 통해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쳤고, 성경공부를 통해 고난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권력과 결탁하면서, 부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고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행동하는 교회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늘 한국교회는 중세 카톨릭교회의 교권주의적 형태를 비판한다. 사실 중세 카톨릭교회는 성직자들의 교권 아래서 부패하고 타락했다. 성직자만이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었다. 교인들은 성직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접할 수 있었다. 마틴 루터는 대담하게 교권을 거부하고, 만인 사제설을 주장했다. 성직자만 아니라 교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서를 읽기 쉬운 독일어로 번역했다. 성례전을 거행하고 성서를 가르칠 목사들의 직책을 부정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목사가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인들과 동등한 존재로서 설교, 성례전, 성서교육을 책임지는 전문적 교역자다.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런 원칙을 실천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부자된 한국교회는 제왕적 목사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교인들이 드린 하나님의 헌금은 호화로운 교회당을 건축하는데 건의 사용하고 있다. 헌금의 상당액수는 제왕적 목사의 품위유지비로 지출되고 있다. 한마디로 오늘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민, 떠돌이들을 등지는 결과를 가져다가 주었다.

한국교회는 이들과 함께 하나님나라운동을 벌였을 때 크게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그저 설교나 듣고 마음의 위안을 받는 곳이 아니다. 낡은 자아를 벗어버리고 초월적인 사랑을 맛 볼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과 사람 속에서 하나로 되고 말씀으로 깨끗해지며, 성령에 의해 활력을 얻는 교회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기독교발전협의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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