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된다는 명분으로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가 호기롭게 닻을 올렸으나, 대교단의 ‘갑질’ 논란, 이단시비, 불통 등 거대한 풍랑을 맞아 순항하지 못하고 표류 중이다. 목표하는 곳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는데, 고작 배만 만들어 띄웠을 뿐 1노트의 속력도 내지 못하고 있다. 배의 항해와 배 안의 모든 사무를 책임지고 선원들을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격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은 아직 배에 오르지도 못했다. 말 그대로 한교총호는 망망대해에 선장도 없이 위용만 뽐내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하나’가 되기 위해 구성된 한교총이 오히려 한국교회 대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순항하고 있는 것처럼 포장되고 있지만, 실상은 한기총과 한교연이 서로의 입장 차이를 여전히 조율하지 못한 상태다. 솔직히 ‘통합’이라는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한국교회를 호도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 가운데 통합의 분수령이 될 ‘이단 문제’ 해결이라는 대명제를 두고서도 양측이 바라보는 곳은 분명 다르다.

해묵은 이단 논쟁 언제까지

한기총과 한교연의 통합을 바라는 것은 모두의 바람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것이 ‘이단’이라는 산맥을 넘어야 한다. 한교연이 한기총과의 통합 테이블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단 문제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기총으로서는 지난해 류광수 목사의 단체가 탈퇴했기에 충족된 것이 아니냐고 당당히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류광수 목사는 한기총 회원 교단인 예장 개혁총회에 속해 있다. 따라서 류광수 목사가 속한 전도협회가 스스로 나갔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됐다는 주장은 모순이다. 언제든지 논란이 재점화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한교연에서는 여전히 한기총의 이단에 대한 움직임에 미심쩍다는 반응이다. 오히려 강도를 높여 한교연 바수위에서는 청원이 들어온 한기총 소속 회원 교단 등에 대한 이단 조사를 더욱 면밀하게 하겠다는 논리를 세웠다. 여기에는 이영훈 대표회장을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까지 범주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수위가 ‘적당히 섞일 수 없다’는 입장을 더욱 견고히 다지고 있어, 그 조사결과에 따라 논란은 더욱 지속될 전망이다.

이런 와중에 모 언론이 한교연 바수위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한기총의 이단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한교연이 오히려 이단으로 규정된 인사를 껴안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언론은 5년 전인 20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당시 바수위 부위원장인 모 인사가 이단을 영입했다고 밝히면서 한기총의 선이단 문제 해결을 줄기차게 외쳤던 한교연도 회원교단 안에 이단문제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지 말라’는 소리다.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이다.

양 기관의 이러한 이단에 대한 대립각은 한국교회를 하나 되는 것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입으로는 ‘하나’라고 외치면서, 속내는 ‘하나’가 되기를 원치 않는 듯하다. 본질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이단’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데,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단 문제 해결은 빠진 채 새로운 이단 정죄로 다투는 양상이다.

안타까운 것은 두 연합기관의 이단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으로 군소교단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점이다. 들판의 이리 떼의 먹잇감이 된 것처럼, 가만히 있는데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있다. 각 교단에 맞는 신학과 신앙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대교단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내몰리거나, 소속 목회자가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두고만 봐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대교단의 철저한 이권 논리에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이들의 신학교마저 ‘무인가’라는 구태의 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130년 만에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두 기관은 이단에 대한 진정성 있는 해결을 원한다면 같은 곳을 바라봐야 한다. 누가 이단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드러난 이단 문제를 합심으로 슬기롭게 해결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각 교단이 갖는 다양성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겠다고 떠드는 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노릇이다. 덧붙여 한국교회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은 이단에 앞서, 한국교회를 좀먹게 하는 각양각색의 사이비임을 깨달아야 한다.

군소교단이 봉인가

한교총 출범과 함께 끊이지 않고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군소교단들의 처우다. 솔직히 한교총을 살펴보면 내로라하는 7개 교단이 앞장서고 군소교단들은 열 맞춰서 뒤 따르라는 격이다. 이를 두고 군소교단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지적의 목소리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인가받은 신학교만을 마치 훈장처럼 인정하려는 모습은 시대에 동떨어진 것으로, ‘7개 교단의 횡포’라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정말 군소교단은 한국교회에 계륵이나 다름없을까. 모 언론사에서 ‘재정과 조직구조, 신학검증이 취약한 군소교단들이 이단의 유혹 앞에 흔들리기 쉽다’고 표현한 것이 맞는 말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어디까지나 편협한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군소교단들은 저마다 한국교회를 위해 두문불출했다.

물론 대교단이 놀고만 있었느냐는 아니다. 확실한 것은 대교단이 앞에서 끌 때, 뒤에서 묵묵히 밀어줬던 것이 군소교단이다. 한국교회 연합사업에서 군소교단의 역할은 무시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들에 대해 마치 인가받지 못한 신학교를 가지고 있는 작은 교단이니까, 대교단이 틀을 만들어 놓을 테니 무조건 껴 맞추라는 것은 겸손하지 못한 행태다. 7개 교단이 한국교회 95%라는 세를 내세워 힘의 논리로 작은 교단들을 무시하는 것은 진정한 하나가 아니다.

대교단의 ‘갑질’논란이 계속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그들 말대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들끼리 하나의 단체를 만들었다고 공표하면 된다. 그 어떠한 이유도 달지 말고, 그저 제 목소리를 내보겠다는 심정으로 또 하나의 단체를 만들었다고 하면 된다. ‘하나’라는 명분을 내세워 제4의 연합기구 출범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이미 정관이 있는 두 기관 위에서 ‘빅 텐트’를 쳐서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자, 대사회적인 리더십을 발휘해보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자 주장을 펼치는 것은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다.

대교단들은 군소교단도 엄연한 교단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가 되기 위한 걸음을 뗐다면 어디까지나 안고 가야 한다. 7개 교단이 앞에서 이끌어가는 모습이 기득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단순히 기우에 지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오히려 대교단이 조금은 손해를 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훨씬 보기에 좋다. 더불어 교단 크기와 관계 없이 1:1의 관계로 군소교단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군소교단이 봉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지 않도록 대교단들이 모든 것을 내려 놓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되기 위한 협상 테이블에 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 부끄럽지 않도록

한교총의 출범은 마치 종교개혁 500주년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만큼 각종 불협화음이 있었는데도 급하게 출범된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하나로 거듭난다는 점은 누구나 인식하는 것이고 환영받을 일이다. 어느 때보다도 의미 있는 해를 맞아 한국교회에 내로라하는 교단들이 한국교회 합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될 사건이다. “왜 이렇게 급하게 가느냐”는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논리로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됨은 그 누구도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교단이나 단체, 개인 등 모두를 끌어안고 가야할 것이지, 대를 위해 소를 버린다는 주장은 단 한명도 설득하지 못할 논리다. 그리고 단순히 거대의 연합기구로서의 모양새만 갖췄다고 진정 하나가 되었다고 자만할 수 없다. 너와 내가 하나가 되고, 우리가 한 곳을 향해 걸어갈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기 좋으신 하나됨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불만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는데, 한낱 작은 불만으로 여겨 모른 채 넘어가면 반드시 화로 다가온다. 작은 불만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과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을 갖춰야 한다. 더욱이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회개와 각성으로 본질을 되찾으려는 노력만으로도 벅찬 시점에서 오히려 비생산적인 논쟁에 발이 묶여 퇴보의 길을 걸어서는 안된다.

작금의 모습은 중세유럽 교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입으로만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 개혁과 갱신으로 거듭난다는 외칠 뿐, 아무런 노력이나 변화의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세속적인 욕망과 재물에 눈이 멀어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주의 종으로써 세상을 섬기기보다는 제왕적으로 군림해 가장 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 보고 있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탐욕에 길들여진 모습만 가득하다.

어느 순간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닌,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혹자는 안티기독교들이나 하는 말이라고 치부하기에 바쁘지만, 가만히 속을 들여다보면 인정하기 싫은 현실에 대한 부정이다. 지난해 기독교가 종교 순위 1위에 올라 반색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국교회를 향한 질타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한국교회의 현재 모습은 칭찬받기에는 부족함이 따른다. 그런데도 유야무야 넘어가면 훗날 분명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은 분명 한국교회에 기회다. 그동안 과오를 깨끗하게 씻고 온전히 거듭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 다면 기우로만 여겨졌던 한국교회의 존폐 문제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 그 기간이 50년 후가 될지 아니면, 그보다 더 빠를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분명하게 일어날 재앙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교회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한다. ‘하나’라는 그럴싸한 명분만 내세워 또다시 한국교회가 분열되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고, 모두가 원하는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 주의 종으로써 제왕적으로 군림하려는 모습에서 탈피하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땅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과 섬김의 본을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는 ‘하나’를 핑계로 이권 쟁탈에 열과 성(?)을 다하지 말고, 진정 하나가 되기 위해 서로 양보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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