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거부했다. 이것을 본 예수님은 “노하시면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막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어린이들을 기준으로 삼는 말로 “누구든지 한 어린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어린이 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어린이들의 윤리도, 도적성도 아니다. 더욱이 종교성이나, 효율성도 아니다. 한마디로 저들의 ‘공적’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있다면 어린이라는 것 자체가 그대로 인정되어 새 세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준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은 제자들의 태도에서 반영된 유대교의 어린이관에 대한 배경에서 보면, 그 성격이 사회적 약자의 경우와 같다. 어린이는 바리새체제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바리새체제란 계율을 알고 지킬 수 있는 자들을 위한 것, 즉 성인의 체제다. 그러므로 어린이를 멸시했던 것이다. 이러한 어린이가 새로운 가치의 기준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치는 무엇에서 성립되는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죽을 수 있는 대상이 뚜렷한 경우이다. 어린이에게는 분명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어린이 그 자체가 가치이다. 이들에게 꾸밈이 없다. 어른들처럼 윤리나, 도덕성, 종교성, 효율성도 없다. 새로운 세계의 참모습 그대로이다. 어린이들을 위하는데서 삶의 의미를 느낄 때, 비로서 나의 가치가 되는 것를 교훈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의 가치는 뚜렷하다. 부자가 되는 것이며,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재력과 권력이다. 그것은 실용주의와 실리를 바탕으로 근대화를 이루는 것이며, 경제적 삶의 풍요함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어른은 어린이들에게 해야 할 일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아래에서 위로 향하여 해야 할 의무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충효를 내세워서 말이다. 성인은 충효의 대상이고, 의무는 없다. 그렇다보니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돈을 주고 거짓자격증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휴머니스트 카뮈는 “나는 여러분과 함께 악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과 함께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나는 어린이들이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이 세상에 맞서서 싸우기를 결코 그치지 아니 할 것입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 추상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피로 얼룩진 우리 시대 역사의 모습을 마주 보는 것입니다. 법도 없고 곳곳에서 지칠 줄 모르는 어린이들과 사람들을 위하여 몸을 내대고 있는 한줌의 사람들의 외침을 온 세상 수백만 그리스도인들의 참소리를 합해야 할 줄 압니다”라고 파리의 도미니코 회원들을 향해 외쳤다.

이 연설문에는 어린이들이 학대받는 것을 고발하고 있다. 폭정과 어린이 학대의 함수관계는 성서에서도 여러차례 언급하고 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어린이를 학살한 것이나. 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 헤롯이 어린이들을 학살했다는 기록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기아와 전쟁, 그리고 폭정에 시달리던 어린이들이 보다 낳은 삶을 찾아 부모와 함께 지중해를 건너다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또한 그들이 원하는 나라에 도착해서도 고난은 계속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린이는 어린이로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무한의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어떤 기준적인 것을 주입해서 꼭두각시로 만들거나, 어떤 기성화된 목적의 이용물로 삼는 것은 죄악이다. 히틀러는 기초학교를 초등학교로 고쳤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배타적인 민족의식과 군국주의를 주입시켰다. 한마디로 침략군대로 기른 것이다.

그런 위기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새로운 가치기준으로 등장시켰다. 그것은 기존가치관이 오염되지 않은 계층일수록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지키고, 그들의 편이 되는데서 삶의 의미를 찾고, 새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굿-패밀리 대표/개신대 상담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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