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 보 연 교수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8년이 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3.1만세운동의 주체이며, 대한독립운동의 조력자들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잊힌 독립운동의 조력자들 중 한사람인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경상북도 문경 박씨 문중의 묘역에 일본인 혈통이면서, 조선인 사상을 가졌던 ‘가네코 후미코’의 묘역이 있다. 그는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아 무적자로 학교에 가지를 못했다. 설움과 가난 속에서 근근이 살아야만 했다.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는 고모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가네코를 양녀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가부장적 혈통을 중요시 하는 친족의 반대로 입양이 무산됐다. 이 때 조선에서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네코는 조선의 3.1만세운동으로부터 부당한 권력에 대한 조선인의 저항정신과 약자에 대한 연민사상을 가지게 된다. 힘을 가진 제국주의 일본인보다는 조선인에게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것이 기구한 운명을 가진 가네코에게는 더 편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가네코에게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강제적으로 외삼촌과 약혼시켰다. 하지만 외삼촌은 가네코의 과거 행실을 문제 삼아 파혼을 선언했다. 친척과 이웃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은 가네코는 혼자의 힘으로 일어나겠다며, 도쿄로 갔다. 이곳에서 신문팔이와 오뎅집을 전전긍긍하면서 주경야독을 했다. 가네코는 여기에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만남을 가졌다.

조선독립운동가의 만남은 대일본제국의 무적자요, 비국민으로서, 또한 일본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희생당한 여성으로서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3.1만세운동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조선인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과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식이 다시 싹텄다.

가네코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면서, 시인 박 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박 열에게 반한 가네코는 곧바로 동거를 시작했다. 박 열과 가네코 커플은 자신의 분노가 일본천왕에게 향해 있었다. 이것을 확인한 이 커플은 천황에 대한 테러를 도모하기에 이른다.

결국 일본천황에 대한 테러는 조선에서 오기로 한 폭탄이 도착하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을 계기로 표적 수사로 검거됐다. 이 커플에게 적용된 일본법정의 죄목은 ‘대역죄’였다.

법정은 눈엣가시인 이 커플에게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그 순간 가네코는 ‘만세’를 외쳤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는 외침, 일본 천황제의 폐해에 대한 외침, 일본 가족제도에 희생당한 여인의 외침, 피압박민족의 외침, 가족과 이웃에게 버림받은 약자의 외침 등등이 그대로 배어 있다.

이 커플은 일본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천황제의 모순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1926년 이웃나라의 시선을 의식한 일본법정은 천황폐하의 은사라며,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럼에도 박 열과 가네코의 천황을 향한 투쟁은 멈추지를 않았다. 오히려 이 커플은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독립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끝없는 투쟁을 벌였다.

사형에 대비해서 가네코와 박 열은 옥중에서 혼례까지 치렀다. 그 후 가네코는 옥중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때 나이가 23세였다. 가네코의 자살은 집요하게 전향을 요구하는 일제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었다. 한마디로 가네코는 자신의 조국인 일본을 배반하고, 동족을 버렸다. 이런 점에서 가네코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진다.

일본의 한 학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제국의 아나키스트”라고 그의 정체를 요약했다. 가네코의 유해는 박 열의 형에 의해 수습돼, 박씨 가문의 선산인 경상북도 문경에 묻혔다. 조선을 사랑했던 가네코는 결국 조선 땅에서 열원한 안식을 얻었다.

굿-패밀리 대표/ 개신대 상담학교수

저작권자 © 기독교한국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