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명 환 목사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자유와 복음의 자유를 주었다.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했다. 본래 율법자체는 선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악한 권력과 만나면, 인간을 파멸로 끌어들인다. 율법이 나쁜 독재자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악한 권력을 유지하는 무서운 힘이 된다. 불의한 사회구조와 결합되면 불의한 사회체제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이용해 가난하고, 소외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이들을 죄인 취급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복음의 자유와 영적인 자유를 선포하셨다. 율법으로부터 선언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가두는 자와 갇힌자,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등 사이의 벽을 허물고 서로 화해시켜서 하나되게 하는 복음이다.

반복해서 짓는 죄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먼저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기득권과 위계질서가 깨어져야 한다. 율법은 기득권과 위계질서를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 예수님은 안식일법과 정결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 하셨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 법이 적용되는 것을 보면, 법이 권력자들과 가진자들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 율법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선언한 것은, 인식일에 마무것도 안하고 쉬면, 가족의 생계문제에 걸려, 일할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결법 역시 그렇다. 가죽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은 몸을 씻고 교회당에 갈 수 없다. 도저히 정결법을 지킬 수 없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 병신, 정신병자 등을 향한 복음의 자유를 선언한 것이라고 믿는다.

교도소는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 강제적인 장치이다. 교도소는 이 사회의 다른 한 면이며, 이 사회의 그림자이다. 사회와 분리시켜서 생각할 수 없다. 교도소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다. 교도소하고 먼 사람들은 대체로 사회로부터 혜택을 받은 사람이거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이 두부류의 두꺼운 벽을 허물기 위해 복음의 자유를 선포하셨다. 바울은 할례에 대해 이스라엘 사람의 특권과 우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섰다. 바울은 할례와 같은 인간적인 기득권이나, 우월성을 버리는데서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성립된다고 역설했다. 한마디로 이런 것을 버리는 사람만이 하나님나라를 상속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자신과 율법주의의 사고에서 해방시켜 모든 인간의 종이 되도록 하셨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인간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가족, 친구, 교인들에게만 아니라, 지금 고통당하고, 굶주리고 슬피우는 자, 전쟁과 기아로 인해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

지금 강도만난 사람을 돕지 않고 외면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자유도 포기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상처받은 이웃의 아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 아픔에 귀를 막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없는 사람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떠돌이, 외국인 노동자, 기아와 테러, 그리고 전쟁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교회는 이들을 향해 행동하는 교회가 되자.
 
인천 갈릴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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